[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2]

2025-07-11     권경희 작가

지서장 자리에는 쉰 살쯤 돼 보이는, 키가 작고 머리가 조금 벗겨진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 명패에는 지서장 권태인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김승만 경장의 소개에 민기는 사복을 입고 와서 죄송하다는 말부터 했다. 고향이라 그런지 정복을 입고 버스에서 내리기가 공연히 쑥스러웠노라고 덧붙였다.
“참, 자네는 자원으로 오게 된 거지? 잘 왔네. 고향을 떠나는 사람만 있는 세태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으니.”

“저도 계급장 바꾸는 일만 없었으면 이런 연고도 없는 촌에 안 왔을 겁니다. 만년 순경이라도 대전서 교통 경찰하는 게 나았을 텐데...”
김승만 경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고정하세요. 한두 번도 아니고...”
강 순경의 짜증어린 목소리와 우당탕 소리가 동시에 들려 왔다. 말싸움이 육탄전으로 바뀐 것이었다.
지서장은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별로 뚱뚱하지 않은데 행동이 느린 걸로 보아 성격도 느긋한 듯했다.

지서장이 일어서자 사무실의 소란이 금방 뚝 그쳤다.
“최 선생, 원 선생. 그만 하시오. 자- 자, 이리 들어와 앉아서 얘기하시오. 박 순경, 자네 자리는 저쪽이니 어서 짐 풀고 들어가 쉬게.”
원 씨와 최 씨는 아까보다는 훨씬 낮아졌으나 여전히 화가 난 목소리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민기는 그들 눈에 띌세라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휴 진땀 뺐네. 아무것도 아닌 일 갖고 열흘이 멀다 하고 찾아와 난리법석이니... 그 흔한 불량 청소년조차 없어 심심하다는 송전 지서인데 저 노인들이 우리 심심할까 봐 위문 공연 오는가 봅니다.”

책상 위에 짐을 푸는 민기를 보고 강 순경이 푸념으로 인사를 대신해 왔다.
민기는 웃음으로 답례했다.
“이제 박 순경이 저분들 좀 맡으십시오. 말을 들어 주면 더 기가 나서 한도 끝도 없으니.”
 강 순경의 엄살을 뒤로 하고 민기는 밖으로 나왔다. 해가 노송산(老松山) 위에 깔딱깔딱 걸려 있었다.

자전거포 앞의 남학생들도 분식집의 여학생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거리는 한적했다. 밥집과 술집에서는 이제 막 잠을 깬 듯 희미한 전깃불이 부스스 흘러나오고 있었다. ‘CAFE 솔밭’이란 네온사인이 희뿌연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낡은 슬라브 건물 위에서 저 혼자 명멸하고 있었다.

민기는 ‘번창 경운기 상회’로 갔다.
“원종일, 안에 있나?”

가게 안에 불은 훤히 켜져 있는데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없었다.
민기는 상회에서 나와 별 생각 없이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카페 안은 겉에서 보기보다 꽤 넓었다. 실내 장식도 퍽 세련돼 보였다.

좌석에 앉아서의 시선만 살짝 가리도록 천정부터 내려 걸린 마로 꼰 매듭이며 커다란 중국산 부채가 걸려 있는 옅은 갈색 벽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제 막 잎갈이를 하는 가을 소나무밭 같았다. 그러나 손님이라곤 구석 자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한 무리밖에 없었다. 원종일은 면사무소 직원이나 농협 직원으로 보이는 그들과 섞여서 맥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민기를 발견한 원종일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어머니 병환은 차도가 있으시고?”

민기와 함께 따로 앉은 원종일이 물었다.
“... 너의 아버지가 서에 계시더라. 순임이 아버지하고.”
민기는 대답 대신 지서에서 본 일부터 말했다.
“늘 그러신 걸 뭐.”
“집에 모셔다 드리지 그래.”

“모르는 척 하는 게 상책이야. 저러다가 막걸리 한잔 드시고 집으로 돌아가시겠지.”
하긴 그랬다. 민기도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두 사람은 싸움 후에 술집을 가도 꼭 같은 집엘 갔다. 그리곤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 술집 주인을 사이에 두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엇비슷하게 술집을 나서서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언쟁을 하곤 했다.

“오토바이 한 대 구해 줘. 출퇴근 때 타면 되니까 125 씨씨 정도면 되겠어.”
“그러지. 마침 면사무소 다니는 친구가 팔아 달라고 내게 맡겨 놓은 게 있어.”
원종일이 흔쾌히 수락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