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3]
“어머니가 기다리시겠구나. 오늘은 내 오토바이로 태워다 줄 테니까 함께 가지.”
원종일을 따라 나서는 민기의 눈에, 계산대가 있으면 맞음직한 카페 입구 탁자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쩍 마른 몸에 가냘픈 어깨, 안경 속 너머로 여자만큼 긴 속눈썹을 한 그는 일부러 장식해 놓은 소품처럼 카페 분위기와 썩 잘 어울렸다.
“오셨습니까?”
민기의 눈에는 주방 옆의 내실에서 나오며 그 사내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여인의 모습도 함께 비쳤다. 훤칠한 키, 호리호리한 몸매에 금속 장식이 달린 갈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사내 쪽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민기는 마치 객석에서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카페에 있던 그 사람 누군지 알아?”
원종일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며 민기가 물었다.
“작년에 송전 학교에 새로 온 국어 선생.”
민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원종일이 낮게 한숨을 쉬는 것을 감지했다.
저수지 둑길을 지나고 송계리(松溪里)를 지나자 송암리(松岩里)가 안개에 싸인 듯 희뿌그레하게 다가왔다. 민기도 원종일의 넓은 등 뒤에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2) 광인의 마을
“배타고 저수지 건너 왔니?”
원종일의 오토바이 소리가 멀어지자 어머니가 민기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널따란 신작로 놔두고 배는 무슨 배를 탔다고 그러세요.”
자기도 모르게 불퉁스런 목소리가 나오자 민기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배를 타서는 안 된다. 죄 많은 에미를 만나서 물귀신이 잡아간다.”
근심어린 얼굴로 자신을 들여다보던 어머니가 나가자 민기는 고향으로 오면서 걸었던 기대가 스러짐을 느꼈다. 이제 치료는 끝났으니 안정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어머니의 병이 실제 나았는가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서 고향땅을 밟았다. 민기의 마음 속엔 고향 마을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송전면은 충청남도 청양읍과 예산읍 사이에 있다. 동쪽은 대덕봉, 국사봉으로 이어진 칠갑산 줄기가, 서쪽은 천마봉을 중심으로 길게 뻗은 천마산 줄기가 병풍처럼 서 있고 예산부터 청양까지는 고속도로를 닦으면 수월함 직한 길다랗고 좁은 평야 지대이다.
최근에 지정된 칠갑산 도립공원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같은 줄기의 북쪽 끝에 있는 해발 489미터의 국사봉 아래의 낮은 산 가운데 하나가 송림산(松林山)이고 이 송림산과 서쪽 천마산 줄기의 작은 산인 노송산 사이가 청양군 송전면이다.
송림산 기슭의 몇몇 마을과 서쪽을 길게 가로막고 있는 노송산 사이의 넓은 논밭 군데군데에 모여 있는 마을, 그리고 노송산 주위에 보금자리를 튼 몇몇 마을이 송전면에 속해 있다.
좁은 평야지대 한복판에 있는 송전리에서 송림산을 향해 가다 보면 일제 시대에 축조된 저수지 송지호(松池湖)가 나타난다. 저수지가 생겨나기 전에는 그 한 가운데로 트럭이 지나다닐 만큼 넓은 도로가 있었고 가뭄이 들어 송지호의 수위가 낮아지면 지금도 그 길이 반쯤 드러나 보인다.
송전면 일대의 가뭄 걱정, 홍수 걱정을 없애준 이 저수지는 그러나 송암리 사람들의 생활 형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산기슭에 있는 밭뙈기 몇 마지기를 제외하면 농사지을 땅이 모두 물속에 잠겨 버렸기 때문에 논농사를 지으려면 저수지 아랫동네까지 가야 했다.
무엇보다 괴이한 일은 저수지를 조성했던 때부터 송암리에 미친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을 노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일정 때 왜놈들이 산의 정기를 없앤다고 국사봉 꼭대기의 임금바위에 쇠막대를 박아 양기를 빼 놓은데다가 바로 그 아래 골짜기를 막아 송지호를 파서 음(陰)이 성해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을을 품에 안고 있는 산이 제 힘을 못 쓰고 있는데 음기가 발동을 하니 마을 사람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 리가 없다는 논리였다.
하여튼, 송암리에는 저수지 공사 때 일본인 감독관에게 삽으로 머리를 맞고 혼이 나가 버린 안 서방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친 사람이 둘도 아니고 꼭 한 사람씩 이어져 왔다.
안 서방이 물속에 있는 보물을 찾겠다고 허황한 소리를 지르며 저수지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영 못 나온 뒤로는 원종일의 할아버지가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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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