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기생 장은실 22

2025-08-22     이상우 작가

종심이 자신은 은실이보다 2년이나 먼저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머리도 올린 지가 꽤 되지만 아직 수중에 단돈 5십 원도 없었다. 
뭇 잡놈들 정욕 채워 주느라 아랫도리가 성할 날이 없었다. 낙태도 세 번이나 했다. 양잿물 마시다가 죽을 뻔 한일도 있었다. 왜놈 자식들은 어째 만나는 놈마다 그렇게 변태가 많은지. 엉뚱한 짓을 하려는 놈도 한두 놈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 머리도 못 올린 은실이가 9백 원이나 모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성중석 도련님 아버지라도?"
종심이 얼른 내뱉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어쩌다가 땄어. 원대 경마장에서."

은실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자 종심의 무안해 하던 얼굴이 펴졌다.
"그 돈이면 무엇이든 한번 시작할 수도 있겠다." 

경욱이 만주로 떠난 뒤 은실은 한때 울적한 마음이 되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은실아, 기적에서 빠지는 일 큰 언니하고 좀 상의해 보았니?"

은실이가 울적해 하는 모습을 며칠 지켜보던 종심이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아니. 큰 언니보다 브루엔 사모님을 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서."
"그거 잘 생각했네. 기적에서 빠져 나오는데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지."
은실은 남문교회로 브루엔 선교사 부부를 찾아갔다. 헨리 브루엔 선교사는 서울에 가고 없고 마르타 브루엔 부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기생 일을 그만 두겠다고 했나? 생각은 잘 했지만 어려운 일이야."
브루엔 부인도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대구 부청에 손을 써야 하는데 우리 서양 사람들 말은 잘 들어주지 않거든. 어쨌든 어려운 결심을 했으니 내가 좀 알아보아 주지."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래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생각해 놓은 것이라도 있나?"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나 아주머니들을 위해 야학이라도 세우고 싶은데 쉽지는 않겠지요?"
"야학을?"
브루엔 부인의 눈이 반짝했다.

"그건 꿈이고요. 우선 돈 생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돈 생기는 사업을 하자면 우선 돈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은실이 보고 밑천을 대 줄 리도 없고."
은실은 더 이상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기적에서 빠지는 일만 부탁하고 왔다.
달성 권번으로 돌아오자 성중석으로 부터 전갈이 와 있었다. 저녁때 향촌동에 있는 다루마라는 양주 주점으로 오라고 했다. 다루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양주 전문 고급 살롱이었다. 향촌동은 술집, 영화관, 요정 등이 모여 있는 향락의 중심지였다.

"오이, 은실씨 오랜만이오."

은실이 살롱 안으로 들어서자 중석이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가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회색 료마에(앞섶이 두개 있고 단추가 두 줄로 달린 양복)를 입고 폭 넓고 화려한 넥타이를 맨 중석은 당시대 최고의 멋쟁이로 보였다. 그러나 뭉턱한 코나 심술궂어 보이는 뺨이 지성적인 인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24. 기생의 인사법

"그 동안 더 예뻐진 것 같구먼. 나는 언제나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지."
"예? 바라만 보시다니요?"
"그럼 내가 은실이 손목이라도 잡아보았소? 오늘은 결판을 내고 말아야지."
"결판을 내다니요?"

은실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무슨 결판을 내시려고요? 아이고 겁난다."
은실이 엄살을 피웠다. 무슨 말을 할지는 대개 짐작이 갔다.
"이제 가짜 기생 노릇 그만해야지요."
"가짜 기생이라니요?"

"머리 올리기도 싫어하는 기생이 가짜 기생이지 뭡니까? 안 그래?"
중석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은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눈만 흘겨 보였다.
"기적에서 이름 빼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이라도 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 아닐까요?"
"현모양처가 되는 길 말이죠?"

중석은 은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중석, 사꾸라이 사부로를 나쁜 남자라고 말했으나 은실은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기적에서 빠져나오는 일을 날마다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은실은 성중석이 이외로 쉽게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실은 중석에게 결코 신세를 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어쩐지 자꾸 말려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길을 꼭 피해서 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적에서 빠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은실이 흥미를 보이자 중석은 다시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고 말했다.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내가 힘써 줄게요. 자, 우선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 하지요."
중석은 웨이터를 불렀다.
"아사히 비루 두어 병 가져오지. 안주는 마른 것으로 하고."
"대구포와 육포, 낙화생 볶은 것이 있는데요. 그렇게 할까요?"
낙화생(落花生)이란 땅콩을 말한다.

두 사람은 맥주잔을 들고 '간빠이'를 나직하게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기적에서 빠져 나오는 일을 의논하려고 했어요. 도와주신다니 감사하네요."
"정말 그 생각을 했단 말이오? 그럼 무엇을 하려고요?"
중석이 반가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만 일이라도 혼자 돈 버는 일을 하고 싶어요."
"돈은 벌어서 뭐하게요? 애써 돈 벌려고 노력 할 것 없이 돈 많은 신랑감 얻으면 그게 빠른 길 아닌가요? 하하하."

은실은 우습지 않은데 중석은 자기 말에 취해 한바탕 웃었다.
"신랑감이 그렇게 쉽게 있나요? 더구나 기적을 그만두면 퇴기(退妓)가 되는데."
"퇴기라고요? 열여덟 살 먹은 춘향 어미 나오겠네. 하하하."
중석은 이번에는 테이블을 치면서 웃었다.
한참 웃고 난 중석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일 당장 시작합시다. 우선 내일 저녁에 누구를 한 사람 만나 주어야 합니다. 그냥 술자리에 손님으로 참석만 하면 됩니다."
"기생이 아니고 손님이라고요?"
"다른 기생을 부를 수도 있지."

은실은 중석이 누구를 데리고 올지 몰라 약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튿날 은실은 혼마찌에 있는 조선 요정 해동원에서 중석을 만나기로 했다. 

해동원에 들어서자 월선 언니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은실의 인사를 받은 월선은 반갑게 맞으며 은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잘 왔다. 네가 기생이 아닌 손님으로 우리 집에 다 오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월선은 흐뭇한 얼굴로 은실이를 바라보았다.
"장은실 왔습니다. 서방님."
월선이 장지문 밖에서 큰 소리로 말하자 문이 열렸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