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11]

2025-09-12     권경희 작가

"반 년 됐습니다.
대부분 " - 요."로 끝마치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습니다."로 말을 마치는 여인을 민기는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여인은 어깨선이 빳빳한 황토빛 정장 투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영화에 나오는 나치 군복처럼 썩 어울렸다.
"이곳이 고향이신가요?"
스물 일고여덟쯤 되어 보이는 여인에게 질문을 하며 민기에게는, '이 또래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하는 생각을 했다.

여인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선영혜입니다."
"희성(稀姓)이시군요. 물론 본명이 아니겠죠?"
여인은 또 미소로 대답했다.
"이 집에 종업원은 없습니까?"

"부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심부름하는 총각이 한 명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저녁에 나옵니다."
선영혜는 커피를 다 마시도록 쉬지 않고 해 대는 민기의 질문에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대답했다. 왜 그렇게 꼬치꼬치 묻느냐는 반문이 나올 법도 하건만 때론 잔잔한 웃음으로, 때론 명확하게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훔쳐보듯 본 선영혜의 얼굴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처음엔 마주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쌍꺼풀이 크게 진 눈과 오뚝한 콧날이 거리감을 주었지만, 작고 도톰한 입술은 이곳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지금보다 더 가까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호호호."
다 마신 커피 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민기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선영혜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손톱이 참 재미있게 생기셨네요."

선영혜의 말에 민기는 자신의 손톱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참으로 뭉툭하고 못난 손톱이었다. 어머니의 표현대로, 작두로 손끝을 싹둑 잘라놓은 것처럼 납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닮아 납작한 민기의 손톱을 깎아 주며 한바탕 놀리고는 "그래도 손톱 납작한 사람이 재주가 많단다" 하며 위로해 주곤 했다.

"손톱 납작한 것도 유전인가 봐요. 저희 집도 어머니는 손톱이 길쭉하고 예쁜데 아버지는 엄지손가락만 납작했어요. 저는 어머니를 닮아 이렇게 갸름한 편인데, 언니는 반만 물려받아서 왼쪽 엄지손톱만 납작해요. 호호호."
선영혜는 다시 즐겁게 웃었다. 그런 선영혜를 보며 민기는 잔잔한 정감을 느꼈다.
"고향에 돌아오신 소감이 어떠세요?"

선영혜의 말끝은 어느 결에 "-요."로 바뀌어 있었다.
"막막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왔는데..."
민기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민기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요즘 들어 이웃집에 마을도 가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언제 병세가 도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어머니는 민기의 중학 졸업을 손꼽아 기다리더니 이 동네가 싫다며 논이며 밭, 집 등속을 팔아 대전으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가게가 딸린 조그만 집을 전세 내서 미니슈퍼를 차렸다.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미니슈퍼는 보기와는 달리 수입이 짭짤했다. 개인 병원 앞에 자리 잡은 덕택에 주스며 탄산수 등이 곽째 팔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기가 고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 민기의 어머니는 또 한 번 실의에 빠져야 했다. 민기네가 세든 집이 헐린다는 것이었다. 병원 주변의 허수룩한 집들이 모두 무허가 건물이었다. 그 터는 병원 소유로서 병원 증축 공사를 하게 되어 불가피하게 철거를 해아겠으므로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가 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통지서가 날아들면서 동네는 온통 초상집이 돼 버렸다. 알고 보니 대부분이 세입자로, 땅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민기 어머니는 우선 세를 놓은 주인집을 찾아갔다. 서울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다며 엄청난 부자라고 제 입으로 말하던 주인은 반 년 전에 벌써 계약서상에 적어놓은 주소의 집을 팔고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

민기네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집들도 자기네한테 세를 놓은 주인을 찾지 못해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중에도 시간은 흘러 철거일이 다가왔고, 몇 집이 돈을 거두어 법정으로까지 가 보았지만 민기네는 별 수 없이 집을 내놓아야만 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