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12]
주민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철거반원들은 자기들끼리 농담까지 해 가며 작업을 시작했다. 학년 말 고사를 보러 학교로 향하던 민기는 우르르 밀어닥치는 40여 명의 철거반원을 보고 발길을 되돌려 집으로 와 살림살이를 챙겨 꺼내야 했다. 철거반은 끝까지 버티는 집의 물건은 자기네가 꺼내서 대충 길 가에 쌓아 놓기도 했다.
그들은 길다란 밧줄로 집 기둥을 묶었다. 그리고는 여럿이 그 줄을 잡아 당겼다. 그냥 있어도 곧 무너질 것 같았던 민기네 집은 뿌연 먼지를 내며 폴싹 무너져 내렸다. 그때까지 길 건너편의 슈퍼마켓 주인과 가게 물건을 넘기며 흥정을 하던 민기의 어머니는 집이 무너짐과 동시에 실신해 쓰러졌다.
그때 민기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가던 어머니는 운명의 무게에 짓눌린 참으로 가련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병원에 당도하기 전에 민기의 등에서 내려섰고, 그 가냘픈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씩씩하고 큰 걸음으로 마을에 돌아가 흥정을 마쳤다.
민기의 어머니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슈퍼마켓 주인이 값을 후하게 쳐 주었음에도 가게 물건을 판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병원장이 '특별히 배려'하여 임시로 거처하게 만들어 준 천막에 세간 살이를 들여놓으면서 어머니는, 공업 대학에 다니는 형과 민기의 다음 학기 등록금을 뚝 떼어 내어 은행에 따로 넣어 두었다. 받은 돈의 반이나 되는 액수였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산꼭대기에 있는 판자집을 샀다.
"친구 분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요?"
선영혜가 다시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어머니의 생각에서 금방 벗어나지 못한 민기는 대답에 앞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단짝이던 불알친구가 남아 있어서..."
"경운기 상회 하시는...?"
"예."
"그분 말씀으론 송전 학교에도 동창이 있으시다던데...?"
"오정아 선생을 말하는가 보군요."
"저희 가게에도 자주 옵니다. 안정환 선생과 올 때도 있고 경운기 상회하시는 분과도... 저와도 많이 친해졌지요. 커피를 마실 때는 주로 창 쪽에 앉고, 술을 마실 때는 늘 저 안쪽의 커튼이 쳐 있는 자리에 있다가 가곤 하지요. 여선생이 술 마신다고 소문이 안 좋을까 봐 신경 쓰는 것 같았어요."
"오 선생이 술 잘 마십디까?"
"웬만한 남자 분은 대작하기 힘든 상대일 겁니다. 오 선생님이 저희 가게 매상 올리는데 큰 몫을 하시는 걸요."
"이사장과는 잘 지낸답니까?"
민기는 지나가는 말처럼 무관심한 투로 묻고는 바짝 긴장해서 선영혜의 대답을 기다렸다.
"옛날 중국 황실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요. 오 선생은 문 교장을 아버지로도, 교장으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통 그분을 지칭할 때 '그 작자'라고 하니까요. 오빠와 함께 와서 이야기할 때도 '어머니만 아니면...' 하고 두 사람이 뭔가 벼르기도 하더군요."
"오빠라면...?"
"이름은 모르겠으나 오 박사라고 하더군요. 곧 이곳에 병원을 짓고 개업할 거랍니다. 저기 농협 옆의 빈 터가 병원 부지라는군요. 지금은 서울에서 종합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는데 이곳에 자주 내려옵니다."
"다들 시골을 떠나려고 발버둥인데 거꾸로 내려오는 사람도 있군요."
"지방시대 아닙니까? 곧 지방 자치제도 실시된다고 하고..."
"그럼 지금부터 점수를 따놓자는 심산인가 보죠? 무의촌인 고향에서 인술을 펼치는 젊은 의학 박사... 본래 있는 집 자손이니 돈 걱정은 없을 거고, 한 10년 쯤 후에는 저절로 이 고장의 명사가 될 거고."
민기는 어느새 자신의 어조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바뀌어 있음을 느끼고는 제풀에 머쓱해져서 말을 멈추었다.
사실 민기는 오 박사, 즉 오정식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속이 메스꺼웠다. 그가 나타남으로써 본색이 드러난 시골 선생들의 비겁한 작태란... 공부에만 열중하겠다는 그에게 무언가 감투를 못 씌워 안달하던 짓거리. 교무 회의 때마다 그 문제로 쑥덕공론을 하더니 드디어 그에게 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것을 권고했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그 대신 선생들이 선거 운동원이 되어 그의 선전을 하고 다녔다.
어떤 선생은 수업 시간에 강의 대신, 서울에서 쌓은 그의 경험을 높이 사 그를 선출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고, 체육 선생은 조회에도 시간이 아까워 나오지 않는다는 그의 높은 향학열을 본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기는 그때, 선생들이 그렇게 힘쓰지 않아도 오정식이 회장으로 당선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서울 사람, 높은 사람, 세련된 사람만 보면 공연히 주눅 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에게 총애를 받고자 아첨하는 시골 사람들의 자격지심, 굴종 심리를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 민기는 매년 여름방학, 겨울 방학 때마다 코피를 흘려가며 싸움을 해 봤기 때문이었다.
|
[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5]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