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13]
방학이 되어 서울 아이가 친척집에 다니러 오면 민기의 마을 아이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기꺼이 찾아들었던 민기의 휘하를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고 서울서 온 아이에게 머리 숙이고 찾아가 다시 그의 부하가 되는 것이었다.
서울 아이가 민기보다 키가 크거나 헤엄을 잘 치거나 팽이를 잘 돌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서울에서 왔다는 사실 하나만 갖고도 마을 아이들은 일 년에 두 번씩 민기에 대한 배반을 서슴지 않았다.
그때마다 민기는 그들에 대한 배신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들의 비굴을 혐오하면서도 제 무리를 되찾고자 서울 아이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유발시켰고,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마을 아이들의 추앙을 받는 바람에 약간 우쭐해 있던 서울 아이는 맥없이 항복했고 민기는 그제야 마을 아이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의 회장 선거에서도 시골 학생들의 이런 속성이 드러나리라던 민기의 예측대로 오정식은 철저한 비밀 투표였음에도 거의 만장일치로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와 경합을 벌였던 남 선배는 어이없는 참패에 망연자실했다.
중학 3학년에서 선출되는 전교 부회장 후보에 올라 있던 민기는 묵직한 농사꾼같은 남 선배와 함께 일하고 싶어 했다. 예상대로 어렵지 않게 부회장에 당선된 민기는 회장인 오정식이 대입 공부에 전념하느라 학생회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바람에 혼자 동분서주해야 했다. 오정식,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좋지 않은 기억만 자꾸 꼬리를 물 뿐이었다.
"그건 한참 훗날의 이야기일 터이고, 아마 두 남매 사이에 요즘 무언가 해결해야 될 일이 있는가 봅니다."
선영혜가 조심스레 말했다.
"요 근래에도 온 적이 있습니까?"
"보름 쯤 전에 다녀갔습니다. 병원 공사 시작하려고 준비하러 왔다고 하더군요."
"내려오면 어디서 숙식합니까?"
"이사장 사택에 머물더군요."
"오정아 선생의 거처도 그곳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시중드는 아주머니 한 분이 그들과 함께 산다고 합니다."
"오 박사란 사람, 결혼은 안했답니까?"
"아이도 둘 있어요. 파란 눈이지요. 유학 갔을 때 미국 여자에게 장가들었답니다. 부인도 아이들 데리고 가끔 옵니다."
선영혜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얼마 전에 민기와도 수인사를 한 면사무소 직원들이 막 카페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6) 피아니스트 송인숙
"박 순경, 송전 학교에서 전화 왔었네. 문 교장이 전화해 달라네."
술집 여주인이 어수룩한 경찰관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며 지서 문을 들어서는데 방망이를 장난스레 휘휘 돌리며 나오던 김 경장이 말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답니까?"
"그런 것 같진 않네. 하여간 전화해 봐."
김 경장은 하품하듯 느리게 말하면서 지서 옆길로 사라졌다.
"박민기 군이에요? 나 문 교장, 아니 문중훈 선생이에요. 음악 선생."
처음 전화를 받으면서는 "내가 교장인데요"라며 근엄한 목소리로 자신을 밝힌 문중훈의 목소리는 민기가 이름 석 자를 대자마자 옛날의 그 거북하리만치 다정한, 여성적인 말투로 되돌아갔다.
"박 군이 우리 지서에 부임해 왔다는 말을 듣고 진작 초청하리라고 맘먹고 있었는데, 박 군도 알다시피 얼마 전부터 갑자기 위장병이 생겨서..."
문중훈은 위장병에다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마침 박 군도 반가워할 귀한 손님이 찾아오셔서 전화했어요. 우리 학교가 배출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송인숙 양, 아니 송 여사가 지금 와 있어요. 그러니 열일 제쳐두고 오세요."
문중훈은 이번에는 '우리 학교가 배출한'에 힘을 주어 말했다.
민기는 송인숙이란 이름이 들려오자 가슴 속에 파도가 쏴아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송인숙, 인숙 - . 그리운 이름이었다.
민기는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일부러 걸어서 송전 학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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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