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대다수 국민 족보 등재한 나라 한국 유일....인류공동 유산 유네스코 등재 절실
-. 족보, 가족제도 변천사는 물론 사회사, 인구사, 지역문화 연구의 중요한 기초자료 -. 이철우 경북지사, "시대정신 살아있는 역사책, 공동체 기억 저장소, K-컬쳐 근간 이루는 우리 문화의 원형” -. 오세훈 서울시장, “‘나’의 역사를 넘어 ‘우리’의 이야기로, 한국 사회가 지닌 독창적인 가족문화의 상징” -. 김준혁 민주당 국회의원, “과거를 잇고, 미래를 여는 역사 문화 운동이자 시대적 소명”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의 한복판 2005년 7월 21일 국회. 한국 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가 전격적으로 출범하는 날이었다.
울림은 역사학계를 넘어 290여 문중에서 더 뜨거웠다. “만시지탄이지만 역사적인 일이다.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인데 앞장서줘서 고맙다”라는 고마움을 전하는 문자, 전화 등 응원이 쇄도했다. 수많은 언론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불을 지폈다.
‘족보’와 그에 따르는 가족 공동체의 소중함과 소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보다는 잊히고 사라져가는 족보로 상징되는 가족 공동체와 전통문화의 해체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처럼 예상을 웃도는 큰 반향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기록을 중시하는 세계적으로 보기가 드문 문화 민족이다. 한국은 기록유산의 선진국답게 프랑스와 함께 세계 4위의 기록유산 보유국으로 훈민정음해례본, 팔만대장경판 등 20여 점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족보’는 살아있는 역사책이자, 공동체의 기억 저장소
족보는 고려 왕실부터 시작되었으며 왕실 족보를 담당하는 전중성이라는 기관을 따로 두었다. 지방 호족의 연대와 도움으로 출범한 태조 왕건이 성(姓)과 관(貫)을 하사하면서(이를 사성(賜姓)이라 한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성과 이름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특히 문종 때부터는 과거 응시자는 반드시 성명(姓名)과 가계(家系)를 적어야 했으므로 성을 정하고, 선조와 가족 관계를 단선적으로 정리한 문서인 가첩(家牒)이나 가승도(家乘圖), 가계도(家系圖) 등을 만드는 것이 정착되었다.
가계도 등은 한 조상의 계대와 그 후손들의 관계망을 기록한 계보 문서로, 우리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황실이나 왕실, 귀족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기록 형태이기도 하다.
이처럼 성관(姓貫)을 가지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 시대이지만 족보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기이다.
수집이 가능한 후손들을 모두 망라한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가계도인 족보는 조선 초기에 30여 문중에서 시도한 것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양대 전란 이후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를 거치면서 본격화하였다.
사대부의 족보 발간은 중국 송나라에서 출현하여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 한반도로 건너왔다. 다만 중국에서는 흐지부지 명맥만 유지된 족보가 꽃을 피우고 개화한 것은 조선이었다.
그 흐름은 가속화되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전 국민을 거의 수록한 족보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된 족보 중에서 현재 9개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추진위원회가 올해 7월부터 추진한 ‘옛 족보의 유네스코 등재 운동’을 시작하면서 2~3종이 더 존재한다는 신빙성 있는 제보가 있어, 이번 기회에 몇 종이 더 확보될지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주시하고 있다. 큰 보람과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족보는 가족제도 변천사는 물론 사회사, 인구사, 지역문화 연구의 중요한 기초자료로, 우리는 족보에 담겨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폭넓게 조명할 수 있다.
“족보는 단순히 한 가문의 계보를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를 넘어 조상들의 삶과 지혜, 시대정신을 담아낸 살아있는 역사책이자, 공동체의 기억 저장소로, K-컬쳐의 근간을 이루는 우리 문화의 원형”(이철우 경북도지사)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400년대 중후반과 1500년대의 족보에는 고려 시대 풍습과 사회상이 남아 있고, 임진왜란 이후 족보는 성리학적 시대정신을 따랐다.
예를 들면, 초기에는 아들과 딸의 구분 없이 출생 순으로 기록하였고 외손과 친손의 구분도 없었는데 후기로 접어들면서 아들을 먼저 기록하고 딸은 나중에 기록했으며 외손은 아예 제외하고 친손만 기록하는 경향이 굳어졌다.
말하자면, 적어도 조선 초반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이전에는 친손과 외손도 동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이후부터는 동성만을 동족으로 여기는 의식이 형성되면서 족보 편찬도 부계 혈통의 자손만을 기록하는 동성보(同姓譜) 편찬이 대종을 이룬다.
1894년 실시된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음에도 일제 강점기부터 1950년 6.25 전쟁 이전 시기에 족보가 가장 많이 만들어졌는데, 다른 도서들은 ‘출판 1위 족보’라는 장벽을 넘볼 수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양반 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신분 차별에 대한 설움과 양반에 대한 열망이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만들게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성과 가족제도에 대한 범접할 수 없는 애정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가 일제 강점기의 창씨개명 사태다.
젊은 세대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교과서의 표현인 ‘일본식 성명강요(日本式 姓名强要)’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확실한 동화, 즉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일환으로 조선식 성명(姓名)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는 정책을 말한다.
창씨개명은 1910년 국권피탈 때부터 일본이 노리고 있었던 정책이다. 하지만 ‘조선의 정서상, 일본의 성명을 강제하면 매우 위험하다’라는 정세 판단으로 캐비넷 속에 넣어 두고 있다가 3.1운동으로 아예 유보되었으며 1829년 다시 시도했지만, 이 또한 본국에서 만류하면서 중단된 역사가 있다.
본격적으로 시도한 건 1940년 들어서 국가 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하면서부터다.
‘일본식 성명 강요는 대규모 폭동 우려’(조선총독부 보고서) 등의 이유로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대신 일본식 성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완화책을 채택했지만, 이 또한 “조상을 욕보이는 폐성창씨를 할 바에 차라리 죽여라.”라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일제의 ‘일본식 성명 강요’....대만은 환영, 우리 선조들 목숨걸고 저항
일본식 성씨를 만드는 데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대만과 달리, 엄청난 행정력의 동원 속에서도 2달이 지나도 시행률 1%에 그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은 조상을 중심으로 한 가족 공동체 제도에 대해 신앙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집안에 불이 나고 난리 통에 피난을 가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것이 족보였다.
“족보를 통해 우리는 ‘나’의 역사를 넘어 ‘우리’의 이야기를 써 내려왔고, 이는 한국 사회가 지닌 독창적인 가족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오세훈 서울시장)
그럼에도 우리 선조들에게 자신의 생명처럼 여겨졌던 족보가 오늘에 이르러 가족제도의 해체와 무관심 속에 영원히 사라지거나 멸종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의 기록유산이 인류 모두의 공동 자산이라는 인식 아래, 이를 보존하고 보호하여 미래 세대에 전수하고,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유네스코의 취지에 맞게 한국의 족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은, “과거를 잇고, 미래를 여는 역사 문화 운동이자 시대적 소명”(국회의원 김준혁)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