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16]

2025-10-24     권경희 작가

밥을 한 공기 먹은 민기가 잠깐 서에 들렀다가 오겠다고 일어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일어섰다. '솔밭'에 가 있을 테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다.

민기가 지서에 들러 간단히 보고를 하고 약속 장소인 솔밭 카페로 가보니 오정아도 와 있었다. 그들 네 사람 사이에서 요즘 유행하는 대로 앞머리는 길고 귀와 목 위의 머리는 군대식으로 바싹 치켜 자른 청년이 맥주 병 마개를 따고는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주머니에 넣은 왼팔이 허전해 보였다. 외팔이였다.
"박민기 씨, 가까이 살면서도 보기가 어렵네."
오정아가 인사를 건네 왔다.

오정아는 어렸을 적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옷도 파란 물 빛깔 바탕에 검정과 노랑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큼직큼직하게 그려진 엷은 원피스를 입고 있고, 학교 선생치고는 꽤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거무틔틔한 맨 얼굴로 다니는 시골 아낙네들만 보다가 본바탕이 희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한데다가 짙은 화장을 하고, 팔찌로 써도 될 정도로 커다란 귀걸이를 한 오정아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기분도 활달하게 해 주었다. 디자인 전공자다운 강렬한 옷차림에 과감한 치장이었다. 오정아는 제 어머니보다 더 화려한 것 같았다.

그들은 오정아를 중심으로 색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는 무한한 변화를 이루어내는 자연의 색채에 늘 감동해요.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고유의 색상을 갖고 있어요. 저도 이러한 자연을 닮고자 노력해요. 그래서 옷이며 장신구 등을 모두 자연의 색조와 어울리게 갖추지요. 회색과 흰색 등 무채색의 색맹적인 환경에 둘러싸인 우리 학생들에게 제 옷차림과 치장으로써 색채감을 익히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어요. 교사가 곧 살아 있는 교과서 아니겠어요?"
오정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코발트, 하늘색이 모든 색의 기초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한한 공간이 만들어낸 그 빛깔,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이 모이면 이루어 내는 색. 저는 송전면에 올 때마다 파란 하늘과 송지호의 파란 물이 늘 경이로웠어요. 그래서 디자인 관계 서적에 출품할 제 작품의 기본 색상도 파란 색으로 하기로 했지요. 그러다 보니 옷도 파란 옷을 입게 되고 화장도 파란 색조로 하게 되더군요."

오정아는 말을 마치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눈 위에 옷 색깔과 잘 조화되는 파란 색 아이샤도우가보기 좋게 칠해져 있었다. 오정아는 화장도 디자인하듯 공들여 하는 것으로 보였다.
송인숙은 별 말도 없이 앞에 있는 맥주잔의 거품이 다 사그라들도록 마시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술을 못 마셔? 술찌끼에 혼난 것이 아직도 영향이 있나 보지?"
정 기자와 유 기자, 오정아가 화제를 요즘 대학생들에게로 옮겨 열중하고 있는 사이에 민기가 송인숙에게 나직이 물었다. 그 역시 10여 년 만에 처음 만나 하는 질문으로는 싱겁다고 생각하면서...
"응, 어렸을 때 술찌끼 몇 숟가락 먹고 취해서 혼났잖아."

몇 살 때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민기의 어머니가 집에서 막걸리를 담근 후 걸러내고 남은 술찌끼를 대접에 담아 설탕을 타서 준 적이 있었다. 그걸 민기와 형, 인숙, 그리고 인숙의 동생 인희, 이렇게 넷이 둘러앉아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시큼한 술맛이 남아 있어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단 맛이 좋았다.

그런데 함께 먹고 있던 인숙이 갑자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더니 온몸을 긁적거리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쳐다보고 있는 민기 앞에 인숙은 부지깽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너, 민기 이놈. 네가 주머니칼로 우리들 놀고 있는 고무줄 끊어갔지?"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때리려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런 인숙을 보고 어른들은 재미있다고 웃어댔으나 민기는 인숙의 부지깽이를 피해 한나절을 들로 산으로 도망 다녀야만 했다.

송인숙도 그 기억이 나는지 민기와 같이 추억어린 웃음을 입가에 담고 있었다.
"송인숙 씨는 술을 안 드시는가 보죠?"
두 사람의 대화를 얼핏 들었는지 송인숙의 옆 자리에 앉은 정선영 기자가 물었다.

"술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송인숙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나는 술좌석에 술 안 마시는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제일 거북하더라. 나는 취해서 횡설수설하는데 제 정신 또렷이 갖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감시당하는 기분이야. 흠 잡힐까 봐 걱정도 되고."

오정아가 송인숙을 향해 정색을 하고 말하면서 자기 잔을 멀리 밀쳐놓았다. 술을 더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오정아는 다시 유 기자 쪽으로 고개를 돌려 대학생 데모와 정국 얘기를 이어 나갔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