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17]

2025-10-31     권경희 작가

"네가 피아니스트가 되어 돌아오다니, 정말 뜻밖이었어. 신문 기사를 보고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 놀랍기도 하고..."

민기는 송인숙의 야윈 목덜미를 바라보며 힘겹게 다음 말을 꺼냈다.
실제 민기는 6개월 전쯤 '두 재독 한국인 음악가 결혼 - 환상의 커플'이라는 기사를 보고 반가움과 함께 자신이 생각해도 턱이 없는 배신감을 느꼈었다.

인숙이 독일 어딘가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있다는 애기만 얼핏 들었을 뿐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소식도 모르다가 유명인이 되어 돌아오자 반가웠고, 귀국과 함께 독일서 만난 성악가와 결혼한다니까 근거 없이 배신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도, 권리도 없으면서 세상에 발표되기 전에 송인숙이 자기에게는 미리 알렸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공연히 매스컴에서 과대 보도를 해서 그렇지, 아직 더 배워야 해. 결혼을 하기 위해서 귀국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하도 권해서 자그맣게 공연도 가졌던 거구."
"남편은 성악가라고 했지?"
"응."
"어머니는?"

"내 결혼식에 잠깐 왔다가 곧 독일로 돌아가셨어.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을 하루라도 비우면 표가 난다고 부리나케 가셨어."
"너는 언제 돌아가는데?"
"보름 쯤 뒤에."

민기는 인숙 아버지의 소식도 묻고 싶었으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음을 상하게 할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 아버지를 만났으면 했는데... 어디 계신지 찾을 수도 없고, 어머니도 그런 위인 손잡고 예식장 들어갈 필요 없다며 말려서..."
송인숙은 말끝을 흐렸다.

"인희는 결혼식 날 경황 중에 잠시 만났었어. '오늘 비상이 걸려서 빨리 가야 해. 신혼여행 어디로 가? 내가 거기에 따라갈 거야. 첫날은 봐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대신 다음 날 아침 일찍 언니 부부 묵고 있는 호텔로 갈 테니 관광은 셋이 하는 거야. 10년이 넘게 못 본 언니인데 형부한테 양보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신부 화장 받느라고 눈도 못 뜨고 있는데 저 혼자 신이 나서 쫑알거리더니 여지껏 전화 한 통도 없어. 어떻게 자랐는지 얼굴도 못 봤는데..."

송인숙의 두 눈에 깊은 그림자가 졌다.
민기도 송인숙의 가정 이야기는 풍문에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중학 3학년 2학기가 시작될 때 송인숙의 집은 서울로 이사를 했고, 송인숙이 무언가 몹쓸 병에 걸려 고생을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혼한 즉시 송인숙의 어머니는 송인숙을 데리고 처녀 적 자신이 간호사로 취업 이민을 했던 독일로 떠났고, 동생 인희를 데리고 있던 송인숙의 아버지는 1년 뒤에 다른 사람과 재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민기 씨, 이 사진 좀 봐. 호호, 종일이는 그때도 참 어리숙하게 생겼지?"

오정아가 졸업 앨범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민기는 오정아의 웃음에서 원종일에 대한 무시의 감정이 들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희 동창들이 몇 명 정도 있으면 좋으시겠습니까?"
"네다섯 명이면 좋겠습니다."
민기의 물음에 유 기자가 답했다.

"그러면 여기 계신 오정아 씨, 저, 그리고 이 친구 원종일, 다음에..."
"이 사진과 닮은 분을 어제 농협 구판장에서 보았어요."
어느 결에 왔는지 카페의 주인 여인 선영혜가 옆에 앉아 사진 속의 인물을 가리켰다. 민기가 낮에 들렀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선영혜는 입에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도 약간 쉰 듯했다.

선영혜가 가리킨 사진 밑에는 최순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얼굴을 성형 수술하지 않았다면 한번 보고도 사진을 알아볼 만 했다. 최순임은 눈이 작은데다 코가 바짝 들려 있고 입술이 두툼한, 박색중의 박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난기 많던 남학생들도 최순임 앞에서는 차마 호박꽃 얘기를 꺼내지 못했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