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현의 횡설종설(橫設從設)] 그 여자의 남자 이야기
1991년 소설가 김한길이 발표한 장편소설 『여자의 남자』는 대통령 일가를 소재로 한 파격적인 내용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평범한 방송국 작가 강찬우와 스키장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김은영과의 로맨스를 그린 이 작품은 김은영이 현직 대통령의 외동딸이자 이미 유부녀라는 설정으로 당시의 여러 금기를 깼다.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약 200만 부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1993년 MBC에서 김혜수·정보석 주연으로 동명 드라마까지 제작되었다. 드라마는 원작의 열린 결말 대신 비극적 결말로 수정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권력에 짓눌린 주인공들의 파국적 운명이 대중의 기억에 깊이 남았다. ‘여자의 남자’가 된 강찬우는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고, 김은영은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최근 이 소설의 제목이 현실 정치권 가십과 겹쳐 떠오르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여사)를 둘러싸고 불거진 또 다른 ‘남자’ 이야기, 즉 그녀의 사생활에 관한 소문들 때문이다.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들이 나온다. 욕하면서도 본다는 ‘막장 드라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라지만, 지금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본질이 이런 것일까?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그녀의 사적 가십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벌어진 불법과 부정이어야 한다. 김건희의 삶이 소설 같은 기구한 면이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현실의 권력 비리는 가십으로 흘려버릴 우스개 거리가 아니라, 사회 정의와 법치의 문제로 직시해야 한다.
김건희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1990년대부터 축적된 여러 범법 행위의 층위가 그녀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학계와 도덕성 부분에서의 일탈이 출발점이었다. 석・박사 논문은 표절 투성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각종 이력서에서는 허위 경력을 명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내의 역할만 하겠다”며 사과해야 했다.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인 2023년에는 김건희 여사가 지인을 통해 고가의 명품 가방을 받은 사실이 폭로되어 큰 논란이 되었다. 한 유튜브 채널이 공개한 몰래카메라 영상에서 김 여사가 2022년 9월 한 한인 목사에게 약 300만 원 상당의 디올 핸드백을 선물 받는 장면이 드러난 것이다. 이 영상이 퍼지자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을 뒤흔든 2,200달러짜리 백”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고, 영국 인디펜던트지도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스캔들이 한국 정권에 타격을 주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김건희 관련 의혹 가운데 가장 큰 경제범죄 사건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김 여사는 주가조작 선수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대는 이른바 ‘전주’로 가담했고, 도이치모터스라는 코스닥 상장사의 실질적 공동 투자주체로 지목되고 있다. 결국 2025년 8월, 법원은 증거인멸 우려를 인정해 영장을 발부했고 김건희 여사는 전직 영부인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구속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더욱 심각한 점은 김건희가 국정 운영에 전반으로 개입했다는 점이다. 특검 수사과정에서 더 밝혀지겠지만, 김건희 여사는 양평 고속도로를 비롯한 각종 정부 사업과 인사에 막후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지면에 다 담지 못할 정도의 의혹들이 산적해 있다. 결국 권력 주변에서 벌어진 부정부패의 양상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방불케 한다는 지적이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은 헌정 사상 초유의 비상계엄을 겪었다. 윤석열이 돌연 계엄령이라는 비상조치를 시도하며 정국을 혼란에 빠뜨린 것에 많은 전문가들은 자신과 김건희 여사의 비리를 덮기 위한 최후의 발악으로 해석한다. 소설 『여자의 남자』에서 김은영은 아버지의 권력에 갇혀 파국을 맞는다. 김건희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남자’는 그녀를 보호하려다 국가를 망칠 뻔했다. 옐로우 저널리즘 같은 가십성 이야기들에 빠지기엔 국정농단과 계엄 사태를 빨리 정리해야 한다. 이제 이 여자와 남자 이야기도 소설처럼, 비극으로 서둘러 끝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