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생 장은실 31
천황이라는 말이 은실의 입에서 나오자 미야자끼는 벌떡 일어서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천황 폐하의 육군 장교가 조선 여자와 한 약속을 어기기야 하겠어요?"
"군인도 남자라는 것을 알아야지."
"비겁한 남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죠?"
"걱정 말아요. 나는 여자와의 약속을 깨는 그런 비열한 남자가 되기는 싫으니까."
은실은 오비를 풀어 미야자끼의 요와 자기의 요 사이에 줄을 쳤다.
"이 선을 넘어오면 비겁자가 되어 평생을 후회할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대일본 제국 장교님."
미야자끼는 또 '천황 폐하'가 나올까봐 긴장했다가 풀었다.
"내일 새벽에 이 선을 넘었으면 짐승같은 사람이 되고, 이 선을 못 넘었으면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하하하 ..."
"안녕히 주무세요 데이슈(주인0님."
주인님이라는 것은 일본의 주부가 남편을 높여서 하는 말이다.
34. 일본인의 남녀 풍속
은실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누웠다. 미야자끼도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은실은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기묘한 잠자리에서 잠이 쉽게 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미야자끼는 조금 뒤척이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젊은 청년 장교가 벗은 여자와 함께 목욕을 하고 들어와서도 흥분된 마음을 발산하지 않고 곱게 잔다는 것이 신기했다.
욕실에서 본 미야자끼의 태도로 보아 은실은 내심 오늘 밤을 그냥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란 생각을 했다.
정 몸을 열어주기 싫을 때는 손이나 입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백전노장 월선으로부터 들은 일은 있었다. 그 자세한 기술까지 알려 주었다. 은실은 버틸 때 까지 버텨보고 정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우선 그 방법으로 대처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야자끼가 스스로 잠들어 준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미야자끼가 역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학구적인 면을 보여 그가 군인이지만 일본의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만한 인내력과 자부심을 보여준 것이었다.
일본 장교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월선이 겪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의별 잡놈이 다 있다는 것이다.
기생 둘을 불러 한꺼번에 즐기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두 놈이 기생 한 명을 불러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갑에 마누라 사진과 함께 춘화도 몇 장씩은 반드시 가지고 있다. 일본 전통화인 우끼요에 형식으로 그린 그림은 48법이라고 해서 욘주핫뎅(48)이라는 마흔 여덟 가지의 자세를 그린 그림이 보통이었다. 일본 사무라이 세계에서는 남자끼리의 일도 있는데 그것을 쥬도(衆道)라고 했다. 여기에도 '도'를 붙인 것을 보면 그것을 품위 있게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정말 못 말리는 욕정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미야자끼가 잠들었다고 확신한 은실은 살그머니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후스마 문을 열었다.
은실은 현관을 나와 후원으로 갔다. 보름이 가까워진 달이 훤히 정원을 비추었다.
은실은 벤치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부지런히 달을 지나갔다.
은실은 갑자기 경욱이 생각났다.
'지금 만주 벌판에서 목숨을 걸고 왜놈들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르지.'
은실은 갑자기 우울해졌다.
'나는 왜놈 장교의 하룻밤 아내가 되어 온갖 짓을 다하고 있는데...'
은실은 욕실에서의 일이 다시 생각나서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욕정 덩어리 같은 미야자끼의 벗은 몸을 본 것이 왜 경욱에게 미안한 일이란 말인가?
경욱에게 자기를 가지라고 덤볐던 일이 생각났다.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 때는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욱과 미야자끼의 인격을 비교해 보았다.
두 사람 다 보통 남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내력의 극치에 이른 인격자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엄격하게 따지면 적이 아닌가.
한쪽은 나라를 빼앗은 점령군이고 한쪽은 나라를 찾으려는 독립군이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벌거벗고 서 있는 것이다. 아니 누워 있는 것이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은실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밥상을 차렸다. 미야자끼도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갔다. 간밤에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되었지만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나도 출근해야 하니까 일찍 먹고 나서지."
"어제 밤 일은 모두 잊어주세요"
은실의 말에 미야자끼는 싱긋 웃었다.
"조선 여자는 정말 아름다워. 은시루 상은 그 중에도 가장 뛰어난 몸매를 가진 여자야. 누가 주인이 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아쉬웠어. 부디 훌륭한 제국 청년을 만나기를 바라."
은실과 미야자끼의 이상한 하룻밤 부부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권번으로 돌아오자 종심이가 야릇한 웃음으로 은실을 맞았다.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도 상상하는지 계속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은실에게는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야한 상상을 하고 있을까?
"하룻밤 즐거웠어?"
"즐겁긴..."
은실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종심은 더 묻지 않았다.
그날 오후 농산 큰 언니가 은실을 찾았다. 농산은 은실을 보자 근엄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은실아, 앉아라."
무거운 분위기를 알아차린 은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는 이제 자유다."
농산은 첫마디를 뱉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예?"
"너는 이제 기생이 아니다. 조금 전에 부청 사회과에서 너를 기적에서 빼라는 연락이 왔다."
"그게 정말입니까?"
"미야자끼 중위가 힘을 쓴 것 같더구나. 어제 하룻밤으로 그 보답은 충분히 된 것이다. 더 이상 고마워 할 것은 없다."
농산은 계속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에 모아 놓은 네 몫이다."
농산은 누런 한지로 만든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제 몫이라니요?"
"네가 달성 권번의 기생이었다는 것을 잊었느냐? 몇 번 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술자리에 나갔던 화대 중에 네 몫을 모아둔 것이다. 받아라."
"그동안 큰 언니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제가 나가서 다행히 성공하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암. 은혜는 안 갚더라도 꼭 성공해야 한다.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한다. 여자 몸뚱이가 세상을 사는 도구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은실은 봉투를 들고 농산 큰 언니에게 큰 절을 하고 물러 나왔다. 방문을 나서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은실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심이 은실의 손을 꼭 잡았다.
"축하해. 정말 잘됐어."
종심의 말끝은 물기에 젖었다.
"종심아..."
은실은 종심을 와락 껴안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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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