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x파일] “이익 목적이 아닌 사랑을 택한 재벌가”... 변화한 재벌가 혼인 트렌드

‘정략결혼’ 줄고 ‘재계·일반인 혼인’ 늘었다

2025-11-13     이지훈 기자
기업 간, 혹은 일반 가정과의 결혼이 늘어나며 혼맥 네트워크의 축이 ‘권력 중심’에서 ‘이해와 공감 중심’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추세다. [사진 = 유토이미지, 뉴시스]

[일요서울 l 이지훈 기자] 재계 혼맥 구조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기업 총수 일가 4명 중 1명은 정·관계와 혼인으로 연결됐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10명 중 1명 이하로 줄었다. 대신 기업 간, 혹은 일반 가정과의 결혼이 늘어나며 혼맥 네트워크의 축이 ‘권력 중심’에서 ‘이해와 공감 중심’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추세다.

-정략 결혼은 옛말?...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
-세대교체가 만든 가치의 전환… “가문의 결합에서 가치의 결합으로”


국내 대기업 오너 일가의 혼인 관계를 분석한 결과, 과거에는 정·관계와 사돈을 맺는 ‘정략결혼’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재계 및 일반인과 혼맥을 잇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 총수 일가의 혼맥이 사업 확장의 수단에서 벗어나,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2일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2000년 이전에는 총수일가의 24.2%가 정·관계와 혼맥을 형성했지만 2000년 이후에는 7.4%로 급감했다. 반면 재계 간 혼맥은 39.2%에서 48.0%로 확대됐고, 연예인을 포함한 일반 가계와의 혼맥도 24.6%에서 31.4%로 증가했다.

세대별로 보면 오너 2세의 정·관계 혼맥 비중이 24.1%에 달했지만, 3세는 14.1%, 4~5세는 6.9%로 꾸준히 줄었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HD현대)과 고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의 딸 김영명 씨, 구자열 LS이사회 의장과 고 이재전 전 대통령 경호실 차장의 딸 이현주 씨, 최태원 SK 회장과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관장 등은 대표적인 정·관계 혼맥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은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반대로 기업 간 혹은 일반인과의 결혼은 빠르게 늘고 있다. CJ 오너 4세 이선호 CJ제일제당 경영리더는 아나운서 이다희 씨와, 현대차 4세 선아영 씨는 배우 길용우 씨의 아들과 각각 결혼했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자녀 정유미 씨는 일반인과, 정준 씨는 세계적인 프로골퍼 리디아 고와 혼인했다.

[제공 = CEO스코어]

이처럼 혼맥 변화의 배경에는 ‘정치 리스크 회피’도 있다. CEO스코어 관계자는 “과거에는 정치권과의 연이 사업에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감시와 규제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그룹 간 혼맥 연결도에서는 LS그룹이 가장 많은 7개 대기업과 혼맥을 맺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LG와 GS가 각각 4개 그룹과 연결됐고, 현대자동차·태광·BGF·삼표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번 조사는 2025년 공시대상 대기업집단 81곳의 총수일가 중 혼맥 분류가 가능한 38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창업세대와 계열분리 완료 세대의 자녀는 제외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사 결과가 단순한 결혼 양상의 변화를 넘어, 재벌가 내부의 의식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분석한다.

과거 산업화 세대가 혼인을 ‘가문 간 연대’의 수단으로 삼았다면, 지금의 3·4세대는 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즉, 결혼을 통한 영향력 확장보다 ‘함께 살아갈 사람에 대한 선택’이 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 같은 흐름은 재계 문화 전반에도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정치권과의 인연에 기대기보다 경영 투명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커지고, 외부 시선보다는 내부 구성원과의 공감, 사회적 책임 등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