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19]
아이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살폈다. 쪽지의 크기와 형태가 모두 같고, 아이들과 교탁 사이의 거리가 멀어 누구 글씨인지 분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자수 안 해? 선생님이 잡아내기 전에 빨리 제 발로 걸어 나와."
문 선생이 다시 소리쳤다.
그러나 아이들은 멍하니 그의 행동만 주시할 뿐이었다.
"안 나오면 방법이 있지. 여기 쌓여 있는 쪽지 중 자기가 쓴 것을 찾아가게 하겠어. 그러면 쪽지를 못 가진 사람이 범인으로 드러나지."
문 선생이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말했다.
그때 민기가 일어나서 "글씨가 잘 안보여서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아이들이 서로 눈치만 살피는 이유를 알아차린 문 선생은 목소리를 약간 낮추어 쪽지의 내용을 읽어 주었다.
"선생님은 한 아이만 너무 편애하십니다. 저희들은 청소하는데 그 시간에 그 애는 피아노만 치게 하시니 불만스럽습니다. 그 애가 이사장의 딸이라서 그런가요?"
문 선생이 읽는 쪽지 내용을 듣고 민기는 누가 저런 대범한 내용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들의 대변자인 반장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이 그런 사항을 적어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문 선생이 쪽지를 내려놓자 송인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단으로 걸어 나갔다. 쓸 말을 썼다는 듯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누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이제 와서 무슨 추태냐고 힐난하는 듯 작은 키지만 허리를 쭉 펴고 어깨를 뒤로 젖히고 고개를 빳빳이 하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철썩."
송인숙이 교탁 앞에 도착하자 문 선생은 송인숙의 따귀를 냅다 갈겼다.
"누가 감히 이런 말 쓰라고 했어? 조그만 것이 앙큼맞게 스승님을 업신여겨!"
교실 안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송인숙은 눈에 불똥이 튈 정도로 호되게 맞은 뺨을 한번 만져 보지도 않고 나갈 때와 똑같은 걸음걸이로 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나도 피아노를 계속 할 걸. 어려서부터 피아노 치라는 엄마의 성화가 하도 싫어서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꾸었더니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돼 가는 느낌이야."
오정아가, 자기도 싫증만 안내고 피아노를 계속 배웠으면 송인숙 이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인숙인 악기를 빨리 배웠어요. 제가 아끼던 하모니카를 빌려주면서 도레미파 부는 법만 가르쳐 주었는데 하루 연습하더니 몇 달 동안 불어본 저보다 더 잘 불더군요."
듣고만 있던 원종일이 말했다.
"인숙인 뭐든 잘 했어요. 자전거도 잘 타고, 휘파람도 아주 멋있게 불어요. 그런데 바느질은 잘 못해서 가정 시간에 제가 여러 번 도와줬어요."
그때까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최순임이 한마디 했다.
"휘파람을 잘 부신다구요? 거 재미있는 데요. 한번 불어보시지요."
유승수 기자가 말했다.
송인숙은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휘휘---"
'돌아오지 않는 강'이란 가요였다. 누구의 세레나데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유행가 가락이었다.
" ... 겨울 나무 사이로 당신은 가고 /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었네."
송인숙은 그렇지 않아도 서글픈 그 노래를 휘파람으로 아주 구성지게 불었다.
"소리가 좋군요. 이제부터 결혼 생활 얘기와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유 기자가 다시 요청했다.
"네, 저의 어머니가 경영하는 한국 식당에 자주 오는 사람이었어요. 둘 다 음악도라서 쉽게 친해졌지요. 그 사람 집안 어른들이 엄격하셔서, 결혼만큼은 반드시 한국에 와서 할 것이며, 반년 동안은 부모를 모셔야 한다고 하셔서 귀국한 거예요. 이제 그 의무(?) 기간도 끝났고, 다음 학기 시작할 무렵이 돼서 곧 돌아갈 거예요."
송인숙이 시선을 천장에 두고 말했다.
"지금 작곡 공부를 하고 있어요. 취미와 공부 삼아 타악기 연구도 하고 있구요. 한국 대사관이 마련한 '재독 한인 교포의 밤'에서 우리나라 사물놀이 팀의 공연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었어요. 마치 내 심장의 고동 같은 그 소리, 가슴을 후벼 파듯 절절하고, 마음을 다독여 주듯 다정하고, 노도가 울부짖듯 웅장한 그 소리, 그 장단에 넋이 나가는 듯 했어요. 왜 외국에 나가서야 내 소리, 내 가락, 내 장단이 더 좋아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받은 감동이 제 작곡 공부에도, 앞으로의 음악 생활에도 큰 영향을 줄 거예요."
"글쎄요. 보고 싶은 고국 땅을 눈이 시리도록 보았고,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도 만났지만 돌아오기 전보다 더 쓸쓸해집니다. 저 개인적으로 커다란 상실이...."
여러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던 송인숙이 여기서 말꼬리를 흐렸다.
"자, 여러분 이젠 다 됐습니다. 정 기자, 실내에서만 찍지 말고 우리 잔디밭에 나가 기념 촬영을 합시다."
진행을 끝낸 유 기자가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행은 봄꽃이 만발한 학교 뜨락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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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