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생 장은실 29
35. 기생년이 어디를
은실은 우선 거처할 방을 얻었다. 브루엔 선교사와 형신이 함께 있던 남산정(町)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샀다. 그리고 종심이의 주선으로 일찍 과부가 된 아주머니 한 사람을 찬모로 들였다.
선산 댁이라고 불렀다.
은실은 선산 댁과 함께 며칠 동안 간단한 집안 살림을 사드리느라고 정신없었다. 밥 익혀 먹을 정도로 살림이 장만되자 제일 먼저 농산 큰 언니를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우리는 머리가 허옇게 되어서야 기생 팔자를 면했는데, 은실이는 1년도 안 되어 졸업했으니 참 부럽구나."
월선이 너스레를 떨었다.
"장한 일이지. 혼자서 집나와 이렇게 되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제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도 소식을 전하지 그래."
농산이 은실의 표정을 슬슬 보면서 말했다. 달성 권번에서 매서운 목소리로 호되게 기생 훈련을 시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직 그럴 처지가 되나요. 좀 더 제 할 일이 정해진 뒤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셈인가?"
월선의 말투도 '하게'로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큰언니 두 분 덕에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부모님 못지않은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두 큰 언니는 은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튿날 은실은 대학생 신현식과 종심이를 불렀다.
혼마찌에 있는 다루마라는 일식 찻집이었다.
"은실씨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면서요. 축하합니다."
신현식이 웃으면서 말했다.
"기념으로 오늘 내가 비싼 커피 살게요."
"고히를요?"
"고히? 하하하."
종심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사업 계획은 좀 세웠나요? 처녀 사장님."
현식이 익살스럽게 말했다.
"사장은 무슨 사장, 너무 놀리지 말아요."
손사레를 치는 은실은 얼굴이 상기되었다.
"제 생각에는 해안면 비행장 닦는 곳 있지요?"
"동촌 말씀인가요? 금호강변?"
"네, 거기에 조그맣고 아담한 식당하나 차리면 어떨까 싶은 데요. 오차나 커피, 나마까시도 함께 팔고."
"나마까시 파는 일본 고급 식당을? 그 촌구석에 누가 올 거라고 일식당을 차린단 말이야?"
종심이 펄쩍 뛰었다.
"지금은 공사 먼지만 펄펄 날리지만 비행장이 들어선 후에는 불야성이 될 수도 있어요."
신현식이 눈을 반짝였다. 은실은 신현식을 앞세우고 해안면으로 갔다. 공사 차량들이 먼지를 날리면서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인부들이 줄을 서서 지게로 돌을 져 날랐다. 한 쪽에서는 인부들이 십장으로 보이는 완장 두른 사람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살기등등한 공사판이었다.
"시장이 들어서려면 아직 감감하군요."
신현식이 먼지를 막기 위해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잡은 뒤에 시작하면 이미 늦습니다. 어렵더라도 먼저 시작해야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신현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보다 몇 살이나 아래인 은실한테서 날카로운 전망 능력과 대담성을 엿볼 수 있었다.
"비행장 입구가 서쪽이 될 것 같으니 그쪽의 공터를 좀 알아보지요. 큰 도로가 나는 곳을 우선 알아야 할 텐데..."
"장차 여기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는 해안 수리조합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식의 제안으로 은실은 면사무소 앞에 있는 해안수리조합 사무실로 찾아 갔다. 사무실에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낮과 괭이도 쌓여 있는 것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공사를 하기 위한 연장 같지는 않았다.
은실은 문 앞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젊은 남자 앞으로 갔다.
"저어, 여기서 근무하시는 분이세요?"
은실이 말을 걸자 젊은 남자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비행장에 대해 좀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논이 몇 마지기나 됩니까?"
은실이 젊은 남자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주춤하자 현식이 얼른 말을 받았다.
"큰 도로 나는 쪽의 몇 마지기가 우리 삼촌 논인데요."
여기저기서 낮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해안 수리조합에 목을 매는 농민들이었다. 밤을 새우면서까지 항의 집회를 하고 지쳐서 모두 쓸어져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행장 건설 반대 항의 시위는 이제 물 건너간 헛수고에 불과했다.
"도로 나는 쪽이라고요?"
젊은 남자가 일어서서 벽에 붙은 지도 쪽으로 갔다.
은실과 현식이도 따라가서 벽에 붙은 지도를 보았다. 여기저기 줄이 그어지고 찍혀 만신창이가 된 지도였다. 장차 들어설 비행장의 모양이 대강 그려져 있었다.
"여기쯤 되나요?"
젊은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점을 은실은 눈여겨보았다. 비행장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입구였다.
"예. 여기 같네요."
은실이 대충 대답했다.
"여기는 큰 돈 벌게 되는 곳입니다. 농사 안 짓는 게 훨씬 좋아요."
지도에서 비행장의 진입로를 슬쩍 확인한 은실은 수리조합 사무실을 얼른 나왔다.
그 때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넋을 잃고 있던 데모꾼, 아니 농민들의 우르르 몰려왔다.
"저년, 달성 권번 기생 년 아니냐?"
"맞아, 기생 년이야. 왜놈들 그거 빨던 기생년이야."
"야, 이년아. 왜놈들한테 붙어서 그거나 핥아 주지 여기는 왜 얼쩡거려."
"네년 거시기가 그렇게 비싸냐?"
젊은이들이 모두 한마디씩 거들며 은실을 둘러쌌다.
"빨리 여기를 뜹시다. 저 사람들은 지금 땅 뺏기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어요."
신현식이 은실을 감싸고 그 자리를 빨리 빠져 나왔다.
"거기로 가 봐요."
은실은 앞장서서 현식을 재촉했다. 금호강이 멀리 보이는 강을 건너자 초가 한 채가 서있었다.
"저 집 어때요?"
은실이 보잘 것 없는 초가를 가리켰다.
"저 위치가 장차 비행장 입구가 될 것 같군요."
현식이 얼른 은실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초가로 들어섰다.
"무신 일인교?"
초가에 사는 할머니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무너져가는 흙 담만 있을뿐, 대문도 없는 집이었다. 수리를 하지 않아 지붕이 시커멓게 썩었다. 집단이며 소여물이 어지럽게 쌓여있는 마당은 꽤 넓어보였다. 할머니만 나오지 않았다면 폐가로 보았을 것이다.
"주인 할머니세요?"
은실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걸었다.
"다 찌그러진 집에 주인은 무신 주인."
할머니는 불만이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드님은 안계신가요?"
현식이가 물었다.
"와? 우리 아들한테 빚 받을 거 있는교?"
할머니는 몹시 심술이 난 말투였다.
"그게 아니고요..."
현식은 난감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이유모를 오해를 풀려고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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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