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명(소)장(인)을 찾아서-243] 2025 단풍지도 [5] 전라의 가을, 빛으로 익어가는 시간
[일요서울 | 김정아 기자] 전라권의 가을은 산과 절,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함께 물든다. 선운사에서는 도솔산의 붉은 단풍 속에서 마음의 번뇌를 내려놓고 마이산에서는 자연이 빚어낸 형상의 신비를 느끼며 뱀사골에서는 흐르는 물결에 마음을 씻는다.
고창, 진안, 남원으로 이어지는 이 가을의 여정은 풍경을 뛰어 넘는다. 그 속에는 천년의 역사와 신앙,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온 시간의 결이 스며 있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단풍 속에서 우리는 사찰의 고요함과 산의 생명력 그리고 사람의 따뜻함을 함께 마주한다.
지리산 자락에서 도솔산으로, 다시 마이산 봉우리로 이어지는 이 전라의 단풍길은 한국의 가을이 얼마나 깊고 다채로운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다. 천년의 사찰과 불멸의 산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만들어낸 이 붉은 풍경 속에서 가을은 어느새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우리 곁에 다가온다.
구름과 선정이 머무는 도솔산의 불국토 ‘선운사’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도솔산 자락에 자리한 선운사(禪雲寺) 는 천오백 년 세월을 품은 전라권의 대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선운(禪雲)’이라는 이름처럼 산중에 피어오르는 구름 속에 고요히 앉아 있다. 조선 후기에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요사가 산 중턱마다 흩어져 있어, 산 전체가 하나의 불국토를 이룰 만큼 번성했다. 김제의 금산사와 더불어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두 본사로 꼽히며 사시사철 불자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선운사의 창건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신라 진흥왕이 말년 도솔산에 머물며 미륵삼존불의 꿈을 꾸고 감응하여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고승 검단선사(檢旦禪師) 가 창건했다는 기록이다. 역사적 정황상 백제 시대의 검단선사가 세웠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검단선사에 얽힌 전설은 지금도 선운사 곳곳에 전해 내려온다. 본래 이곳은 용이 살던 깊은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과 숯을 던져 못을 메우자 그 자리가 절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마을에 돌던 눈병이 이때부터 씻은 듯이 낫자 마을 사람들은 숯과 돌을 들고 와 연못을 메웠고 그 위에 지금의 선운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말의 귀처럼 솟은 신비의 산 ‘마이산’
진안의 상징인 마이산(馬耳山) 은 이름 그대로 말의 귀를 닮은 두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명산이다. 암마이봉(687.4m)과 수마이봉(681.1m)이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고, 주변에 10여 개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이 산은 진안읍 단양리와 마령면 동촌리 경계에 걸쳐 있으며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독특한 형세가 단번에 눈길을 끈다.
마이산은 계절마다 부르는 이름도 다르다. 봄에는 안개 속에 떠오른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울창한 녹음이 용의 뿔처럼 보여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이 절정에 이르면 붉은 귀처럼 보여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고 검붉게 빛나 ‘문필봉’이라 불린다.
가을의 마이산은 붉은 단풍과 함께 신비로움이 배가된다. 산기슭을 따라 늘어선 단풍나무들이 절벽과 계곡에 번져나가고, 햇살에 반사된 붉은 빛이 탑사의 돌탑 위로 춤춘다. 진입로 약 3km 구간에는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봄에는 벚꽃으로, 가을에는 단풍길로 변신한다. 등산로 곳곳에는 약초체험장, 홍삼스파, 숙박시설이 조성되어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도 인기가 높다.
지리산이 품은 단풍의 결정체 ‘뱀사골계곡’
지리산국립공원 북부에 위치한 뱀사골계곡(蟾沙谷) 은 반야봉에서 반선까지 약 14km 이어지는 웅대한 계곡이다. 지리산의 수많은 계곡 중에서도 가장 계곡미가 뛰어난 곳으로 꼽히며, 이름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물줄기가 한 폭의 청량한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계곡 전 구간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100여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 10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 가 이어진다. 가을이면 이 절벽마다 붉고 노란 단풍이 타오르듯 물들어, 물빛과 어우러지는 색의 향연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