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명(소)장(인)을 찾아서-244] 2025 단풍지도 [6] 붉은 단풍 위로 흐르는 제주의 시간

2025-11-21     김정아 기자

[일요서울 | 김정아 기자] 제주의 가을은 짧지만 그 짧은 순간이 유난히 깊다. 천왕사의 붉은 숲, 사려니의 청정한 향기, 천아계곡의 물소리 그리고 한라산 자락의 억새바람이 하나로 어우러져 섬 전체가 ‘가을의 정원’이 된다.

바람은 여전히 남쪽에서 불어오고, 바다에서는 파도 대신 단풍잎이 출렁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붉게 물든 숲과 검은 현무암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대비는 제주의 자연이 주는 가장 순수한 감동이다.

한라산의 품에서 시작해 바다로 흘러가는 단풍의 여정, 그 길 끝에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이 있다. 제주의 가을은 단풍으로 완성되는 섬의 시(詩) 이다.

한라산의 품속, 단풍으로 물드는 수행의 자리  ‘천왕사’

제주의 가을은 바다보다 산이 먼저 물든다. 한라산의 수많은 골짜기 중에서도 아흔아홉 골의 풍광으로 알려진 금봉곡 아래 자리한 천왕사는 그 중심에 있다. 해발 약 600m 고지, 어승생 동쪽 자락에 아늑히 자리한 이 사찰은 1955년 비룡스님이 토굴에서 참선 수행을 하며 세운 수영산 선원(修營山禪院) 에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1994년 전통사찰로 지정되며 한라산의 영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대웅전 뒤편에는 ‘용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석이 병풍처럼 서 있고, 사찰 마당 왼편에는 하늘로 치솟은 바위기둥이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절을 따라 흐르는 냇물은 맑디맑아 사찰의 고요함을 더하며, 그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라산에서 유일하게 물줄기를 내리는 선녀폭포 가 모습을 드러낸다. 폭포 옆에는 자연 약수터가 자리해 예로부터 ‘영험한 물’로 알려졌다.

가을이면 천왕사의 경내와 절벽 아래로 붉은 단풍이 흩뿌려져신록의 한라산과는 전혀 다른 장엄한 색의 세계를 보여준다. 맑은 공기와 함께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 단풍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자연과 불심이 하나 되는 ‘가을의 도량’이라 할 만하다.

신성한 숲에서의 힐링 트래킹  ‘사려니숲길’ 

‘사려니’란 제주의 옛말로 ‘신성한 숲’ 또는 ‘실처럼 이어진 곳’ 을 뜻한다. 이름 그대로 사려니숲길은 제주의 가장 깊고 청정한 숲길로, 비자림로에서 시작해 물찻오름과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진 약 15km의 구간이다.

길 초입부터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들어선 삼나무와 편백나무 가 숲 터널을 이루고 그 사이로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가 섞여 계절마다 색을 달리한다. 가을에는 삼나무의 짙은 녹음 사이로 붉은 단풍잎이 피어나며 흙길을 밟는 발끝에서 은은한 피톤치드 향이 퍼진다.

사려니숲은 단순한 산책길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다. 오소리, 제주족제비, 팔색조, 참매 등 수많은 생물들이 이곳에 서식하며,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으로 지정되었다. 자연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평가받으며 숲의 일부 구간은 자연휴식년제 로 출입이 제한되기도 했다.

특히 ‘사려니숲 에코힐링(Eco-Healing)’ 행사가 열릴 때면, 방문객들은 전문 해설사와 함께 숲의 생태를 배우고 명상과 트래킹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가을의 사려니숲길은 단풍이 짙게 내려앉은 숲속의 고요함 속에서 도시의 소음을 잊게 만드는 ‘자연의 명상터’로 사랑받는다.

오름과 숲이 빚은 비밀의 단풍길 ‘천아계곡’

한라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천아계곡은 이름 그대로 ‘하늘 아래의 계곡’이라 불릴 만큼 청정하다. 돌오름에서 천아수원지까지 약 10.9km 이어지는 숲길은 제주의 산악지형이 빚은 자연미의 정수로 천아오름과 노로오름, 돌오름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천아계곡의 단풍은 제주의 숨은 명소 중 하나다. 울창한 숲과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계류가 어우러져, 10월 중순부터 붉은 빛으로 타오른다. 낙엽이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걸으면 발밑으로 단풍이 물결처럼 흘러내린다.

차량으로 천아수원지 인근까지 접근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탐방객은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도보로 걷는다. 길 자체가 하나의 ‘산책명소’이자 가을 트래킹 코스이기 때문이다. 계곡 초입의 돌다리를 건너 숲길로 들어서면,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교차하며 제주의 가을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