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꿈꾸다 ‘짝사랑’에 괴로워했다

숨진 여의사 민씨가 저술한 책 표지.

성(性)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온 유명 산부인과 전문의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 돼 세간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숨진 의사는 서울 청담동에서 여성전문병원을 운영해온 민모(41·여)씨. 지난 2일 오전 숨을 거둔 채 발견된 사인은 약물로 인한 자살로 밝혀졌다. 잘나가는 여의사의 자살 소식은 순식간에 인터넷 인기검색어 순위를 휘저으며 화제로 떠올랐다. 그를 ‘자살’이라는 벼랑 끝으로 내몬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수많은 궁금증과 억측이 쏟아져 나왔다. 성칼럼니스트이자 잘나가는 산부인과 원장이었던 민씨. 그의 석연치 않은 자살은 단순히 우울증 때문이었을까. ‘명기를 꿈꾸던’ 여의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의문점을 집중 추적했다.

민씨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 2일 오전 10시 쯤 딸이 살고 있는 서울 응봉동 아파트에 들렀다 거실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민씨를 보았다.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고, 옆에는 주사기 여러 개와 근육이완제 ‘석시콜린’ 1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약병은 완전히 비어있었고 민씨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자기 팔에 주사 놓아 자살

마취제의 일종인 석시콜린은 과다 투약하면 혈압이 떨어지고 심장이 멈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이는 보통 버려졌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동물을 안락사 할 때 사용된다. 경찰에 따르면 민씨는 오른쪽 팔목에 5군데에 달하는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 경찰은 그가 일반인은 구하기 쉽지 않은 마취 약제를 자신의 병원에서 빼돌린 뒤 직접 주사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민씨 어머니에 따르면 딸은 3년 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해왔다. 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스스로 수면제를 처방해 달고 살았을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민씨 어머니는 경찰 조사에서 딸의 죽음이 우울증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평소 예민한 성격이었던 딸이 3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아왔다. 최근 증세가 더 심해져 많이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민씨의 우울증은 3년 전부터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우울증과 함께 대인기피증세도 보였다. 민씨 병원이 있는 청담동 근처 약사들은 직접 얼굴을 맞댄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려한 약사 A씨는 “민 원장이 변고를 당한 것을 뉴스를 보고 알았다. 평소에도 왕래가 거의 없어 병원을 찾은 환자들을 통해서만 가끔 민 원장 소식을 전해 듣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병원 업무를 간호사와 대리인을 통해 처리했고 그가 병원을 벗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지난해 8월 민씨의 책을 제작한 출판사 측 역시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밝혔다.

출판사 관계자는 “민 원장은 책에 실릴 글을 써주었을 뿐이다. 출판과 관련된 모든 사업적인 이야기는 민 원장의 사업적 파트너인 이모씨와 나눴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는 민 원장이 운영하는 병원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출판사 측은 이씨를 ‘사장’이라 불렀다. 민씨는 철저히 환자진료와 집필에만 전념했고 병원 운영과 실질적 사업은 이씨가 맡아서 했다는 것이 출판사측의 설명이다.

이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같은 사실을 일부 인정했다. 이씨는 “민 원장이 심한 우울증으로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내가 병원 운영을 여러모로 도왔다”고 말했다. 현재 이씨는 병원 문을 닫은 채 혼자서 남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미혼이었던 민씨와 애정관계였느냐는 기자 질문에 강하게 부정했다.

이씨는 “민씨와는 순수하게 사업적 파트너일 뿐이다. 이번 사건이 불거진 뒤 그런 오해를 너무 많이 받아 해명하는 것도 지친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과 관련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민씨는 지난해 2월에도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 드러났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민씨가 많은 양의 수면제를 먹고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 그때도 환자 진료는 물론 여러 잡지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었으며 8월 발간될 책을 쓰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약하던 ‘골드미스’인 민씨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괴로워한 이유는 무엇일까. 민씨의 어머니를 비롯한 그의 지인들은 그가 수년 동안 ‘애정문제’로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특히 이루지 못할 짝사랑에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알리지 않은 민씨의 주변인은 “민 원장이 유능한 의사였지만 한없이 마음 여린 ‘여자’였다”고 전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짝사랑의 아픔에 시달렸고 그것이 우울증의 원인이 됐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민씨가 부와 명성을 양손에 쥐었으나 정작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지 못했고, 상실감에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것은 일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한편 지난해 출판된 민씨의 저서 <명기를 꿈꾸는 여인들을 위하여>가 누리꾼들의 비상한 관심을 얻고 있다. 촌철살인의 글 솜씨로 여성들의 성생활을 일목요연하게 펼쳐놓은 책에 누리꾼들은 줄줄이 리뷰를 내놓으며 민씨에 대한 관심과 애도를 표하고 있다.


병원 운영자 따로 있었다

출판사 관계자는 “사건직후 책 주문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하루 10권 정도였던 판매량이 50배 넘게 껑충 뛰었다”고 책의 인기를 설명했다. 민씨는 책머리에 ‘오직 더 많은 여성들이 건강한 성, 행복한 삶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누구 못지않다는 생각에 기대어 작은 용기를 내 봅니다. 이 책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는 분이 있다면 의사로서 더 없는 보람이 될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여성들이 행복을 찾기 바라며’라는 글귀를 적고 있다. 많은 여성들의 행복을 바란 여의사의 비극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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