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묻지 마세요”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일부 기업들이 사명을 바꿔 달고 있어 그 배경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제 막 시작한 코스닥 상장 기업부터 오랜 전통을 지닌 기업들까지 사명을 바꾸고 있다. 많게는 수백억 원이 투입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사명 변경을 공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이 그 이유를 들여다봤다.

비리 전력 등 ‘과거 세탁용’ 의혹도
체질 개선하고 ‘미래로’ 기업도 있어


사명 변경 이유는 다양했다. 복수의 관계자들은 기업 나름의 이유를 들었다. 이미지 제고 차원이라고 설명하는 관계자도 있었고,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상태에서 논란을 잠재우려는 방안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다수는 사명 변경을 통해 기업 활성화가 주된 목적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일례로 아가방의 사례를 들기도 했다. 아가방의 전신은 보라유통산업이었다. 이 사명에선 유아복·유아용품 전문업체를 연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사측은 1979년 사명 변경을 결정했고, 이후 사명과 상품 일치를 통해 매출 신장에 큰 영향을 얻은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불미스러운 일과 거리를 두기 위해 사명을 변경하는 기업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회사가 ‘동양생명’과 ‘STX팬오션’이다. 동양생명은 1989년 4월 설립돼 1995년 12월 최초로 총자산 1조 원을 넘어섰다.
2010년 3월에는 1051억 원의 흑자를 달성해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흑자를 기록했고, 이후 11년 연속 흑자 기록을 갱신하는 등 눈부신 성장세를 이어왔다. 하지만 모 기업인 동양그룹 불완전판매와 부실CP(기업어음) 파문으로 4만 명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면서 홍역을 앓았다.

‘동양’이란 사명이 고객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동양생명은 그룹 해체 와중에 기존 모체와 거리를 두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올 초부터 회사 이름을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공정거래위원회가 동양생명보험을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동양’의 계열회사에서 제외했다.

동양생명 측은 “동양사태 이후 지속돼온 고객의 우려를 해소하고, 회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며 이번 계열분리를 생명보험 전문회사로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모멘텀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과거 동양그룹과의 관계 문제로 불발된 인수합병(M&A)에 적극 나서 중국 안방보험그룹과의 매각 절차에 속도를 내는 한편 내·외부 설문과 컨설팅 등을 통해 사명변경 및 CI교체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STX팬오션(옛 범양상선)도 STX그룹에 인수된 지 9년 만에 사명에서 ‘STX’를 떼고 다시 ‘범양(팬오션·pan ocean)’으로 돌아갔다. 워크아웃과 법정관리로 ‘STX’ 브랜드에 생긴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시도로 업계는 분석한다. 현재 최대주주인 산업은행도 매각을 위해 ‘STX’를 떼는 게 낫다고 판단해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1966년 범양전용선으로 출발한 STX팬오션은 1984년 범양상선으로 사명을 바꿨다. 1993년 법정관리에 들어가 2002년 졸업했으며 2004년 STX그룹으로 인수되면서 현재의 사명을 갖게 됐다.

STX에너지도 ㈜GS-LG상사 컨소시엄이 조만간 인수합병 절차를 마무리하면 사명을 변경해야 할 처지다. STX에너지는 STX영양풍력 및 STX솔라를 자회사로 두고 있어 이들도 그룹 해체 속에 ‘STX’의 흔적을 걷어낼 것으로 보인다.
코스닥 기업에서는 사명 변경 현상이 더 자주 일어나고 있다. 영재교육 전문업체 G러닝의 경우 기업이미지 제고를 위해 에듀컴퍼니로 상호를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그동안 G러닝은 상장 후 5차례(아펙스→네모→디지웨이브 테크놀러지스→나래윈→G러닝→에듀컴퍼니)나 상호를 바꿨다.

바른손게임즈는 업무 영역 확대에 따라 사명을 바른손이앤에이로 바꾸기로 했다. 역시 상장 이후 5번째 새 간판을 거는 것이다. 이 외에도 게임하이(5번) 및 웰메이드스타엠(3번), 삼일기업공사(3번) 등도 3차례 이상 회사 이름을 바꿨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1월~3월) 중 상호변경을 공시한 코스닥 상장법인은 모두 21곳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23곳이 개명했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연초만 되면 부진한 실적을 기록한 기업들이 너도나도 회사 이름을 바꾼다”며 “상호를 변경하는 기업이 있다면 최근 실적도 꼼꼼하게 살핀 뒤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명변경이 턴어라운드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는 수단이 되고 있지만 정작 실천에는 옮겨지지 않아 상습적인 사명변경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모든 회사가 부정적인 이유 때문에 사명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유로 사명을 변경하는 회사도 있다.
제일모직은 전자·신소재사업 육성 방침에 따라 사명 변경설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패션사업부문을 에버랜드로 양도하면서 생긴 사명과 사업 간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사명을 놓고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일모직의 새 이름으로는 ‘삼성케미칼’이 유력시 되고 있다. 해외사업장에서는 이미 삼성케미칼을 사용한다.

2001년에 세운 미국 현지법인의 사명이 삼성케미칼USA이며, 삼성케미칼 유럽, 삼성케미칼 타일랜드 등 화학소재 관련 해외 자회사는 삼성케미칼OO 형식으로 통일했다. 또 주요 화학 제품은 삼성케미칼 스타렉스, 삼성케미칼 인피노, 삼성케미칼 스타론 등 각종 ABS 수지, 내외장재 등은 삼성케미칼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다.
건설경기 한파 속에 한라건설도 이름을 최근 ‘한라’로 변경하고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지난해 10월 한라건설은 창립 33주년을 계기로 사명을 (주)한라로 바꿨다. 1980년 현대양행의 자원개발부에서 독립해 만든 한라는 1990년 한라자원에서 한라건설로 사명을 변경한 지 약 23년 만에 간판을 바꾼 것이다. 한라그룹의 모기업으로 위상을 재정립하고 ‘건설’의 한계를 벗어나 사업 영역을 다각화 하겠다는 의도다.

최근엔 ‘신세대 한라 기업문화혁신 캠페인’을 추진하는 등 소통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신세대 한라’로 이미지 변신까지 추구하고 있다.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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