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發 97년 대선의 재판’

유승민·이완구 등 새로 대권경쟁 가세
정몽준-김종인 협력…반기문도 또 꿈틀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엔 아홉 마리의 잠룡이 할거했다. 이회창·이홍구·이인제·이수성·이한동·김덕룡·최형우·최병렬·박찬종이다. 언론에선 이들을 ‘9룡’(九龍)이라고 불렀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 ‘평행이론’이다. 여의도 정가에선 20년 만의 평행이론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대세론’을 형성한 뚜렷한 대권주자가 없는 새누리당에서 9명이 군웅할거 하고 있는 까닭이다.


최경환은 친박계의 대안

‘신(新)9룡’에 포함되는 인물들은 꼽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대체적으론 현재 대선후보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여당 주자 가운데 1위를 달리고 있는 김무성 대표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정몽준 전 의원, 홍준표 경남도지사, 이완구 국무총리를 ‘5룡’으로 꼽는다. 여기에 유승민 원내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가세하면 신9룡이 완성된다. 다른 잠룡들도 없지는 않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오래 전부터 대권 꿈을 품고 있었다. 김태호 최고위원도 상황에 따라 잠룡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친박계의 대안으로 꼽힌다.

아직 신9룡 사이에 직접적인 충돌은 없다. 지금은 오히려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김무성 대표가 김문수 전 지사를 당의 보수혁신위원장으로 끌어들인 게 대표적이다. 김무성-유승민 투톱은 공동전선을 구축해 청와대와 각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잠룡들 사이의 평화가 오래 갈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 특히 야권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지지율이 치솟으면서 신9룡들은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만일 ‘문재인 대세론’이라도 형성되면 추격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여기다 야권에선 박원순 서울시장이 벌써 대권도전 플랜을 짜고 실행에 들어갔다는 말도 들린다.

이에 따라 신9룡은 서로 평화 속의 긴장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야권 주자들에게 견제구를 날리는 것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한다. 현시점에서 여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히는 김무성 대표도 마찬가지다.

김 대표는 최근 박원순 시장을 겨냥했다. 박 시장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공무원들이 박봉에도 기대하는 유일한 희망이 연금”이라며 공무원연금 개혁 신중 추진론을 제기한 데 대한 작심발언이었다. 김 대표는 “박원순 서울시장께서 연금 개혁에 어깃장을 놓는 발언을 했다. 지금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만한 분으로서 매우 신중치 못하고 적절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공격했다.

김 대표의 대권행보는 아직 조심스럽다. 집권여당을 이끌고 있는 입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겨우 중반을 맞은 시점에 차기를 염두에 둔 정치적 활동을 본격화하기엔 부담이 큰 까닭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에 광폭행보를 하며 당내에 ‘김무성계’를 꾸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가 청와대 핵심 참모들로부터 극심한 견제를 받은 트라우마도 있다.

다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출마 희망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만큼 김 대표도 물밑에선 외연확대 작업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역 국회의원들은 물론, 새누리당 공천을 노리는 정치신인들과 꾸준히 만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원내사령탑을 맡으면서 중앙정치 무대의 ‘블루칩’으로 등장한 유승민 원내대표의 행보도 부쩍 관심을 받는다. 그와 가까운 한 의원은 “과거와 달리 2017년 대선을 앞두고는 뚜렷한 TK(대구·경북) 주자가 부각되지 않고 있다. TK에선 대구 출신인 유 원내대표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귀띔했다.

서청원 의원, 유승민 지원說

벌써부터 TK지역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유승민계가 형성되는 조짐도 나타난다. TK지역 일부 의원들은 원내대표 경선 때 별도 캠프를 꾸리다시피 해 유 의원을 지원했다. 또 유 원내대표가 원내수석부대표에 조해진 의원을 발탁한 배경에 주목하는 정치평론가들도 있다. 조 의원은 이명박 정권 탄생의 산실이었던 ‘안국포럼’ 출신이다. 대통령 만들기의 노하우를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친박계 좌장인 서청원 최고위원이 유 원내대표에게 우호적이란 사실도 유의할 대목이다. 유 원내대표는 지금은 비박계로 분류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당을 이끌 때 비서실장을 지낸 원조 친박이었다. 당시 서 최고위원이 그의 역량을 높이 샀다고 한다.

이번 원내대표 경선이 친박(이주영) 대 비박(유승민) 구도로 치러졌지만 서 최고위원이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에게 이주영 의원을 지원하라는 ‘오더’를 내리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신9룡 가운데 확실한 친박은 없다. 잠룡 중에서도 최경환 부총리가 유일하다. 하지만 최 부총리는 박 대통령의 신임이 돈독함에도 불구하고 당내에 세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는 대권가도에 시동을 거는 데 큰 장애가 된다. 최 부총리의 개인 캐릭터도 대권 꿈을 꿀 스타일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친박계 좌장이 유 원내대표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친박계에 걸출한 주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비박계 중에서도 말이 통하는 인물에게 ‘포스트 박근혜’ 자리를 넘겨줘야 한다. 이 경우 원조친박으로 박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유 원내대표가 적임자로 떠오를 수 있다.

정몽준 전 의원의 재기 여부도 관심사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절치부심 중인 그는 요즘 들어 주변을 재정비하면서 서서히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는 모습이다. 최근 김종인 전 보건사회부 장관이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로 선임된 일은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이 재단의 이사장은 정 전 의원이다.

김 전 장관은 이미 두 차례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안철수 의원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한 적이 있고, 2012년 대선에선 박근혜 캠프의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냈다. 이 때문에 정가에선 김 전 장관 발탁이 정몽준 대권 플랜을 위한 사전포석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두 사람은 중앙고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엔 김 전 장관이 중앙고 교우회장 자리를 정 전 의원에게 넘겨줬다.

김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 창업공신이지만 대선 이후 자신의 지론인 경제민주화 등의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으면서 박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김 전 장관이 정 전 의원을 위해 3번째 킹메이커로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김종인, 세 번째 킹메이커?

6월 지방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홍 지사는 지방정부를 이끌면서도 전국적 이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핵심 쟁점이 떠오를 때마다 뚜렷한 색채를 드러낸다. 무상복지 논란이 일어나자 경남도 차원에서 무상급식 지원금 중단을 선언했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했던 경제인 가석방에는 반대 목소리를 크게 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최근 들어 여권의 후계구도에 가장 큰 변수로 등장한 인물은 이완구 신임 국무총리다. 충남 청양 출신인 그는 ‘충청대망론’의 중심에 서 있다. 현역 국회의원인 그가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바로 대권을 노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가뜩이나 보수 정권에선 처음으로 총리와 국회의원을 겸하게 된 그에게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시점이다.

이 총리는 취임 직후 대권 도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훌륭한 분들도 많은데 저한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일단 선을 그었다. 하지만 현역 총리라는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하며 지지세를 확보해 나간다면 대권 도전이 현실화 될 수도 있다. 특히 총리 인준과정에서 확인된 ‘충청의 저력’이 그에겐 든든한 힘이다.

아직 2017년 대선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깊은 상황이어서 장외주자가 부상할 토대도 마련돼 있다. 연초 여론조사에서 깜짝 돌풍을 일으켰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표적이다. 본인이 출마 가능성을 일축한 이후 ‘반기문 효과’는 잦아들었지만 여권은 물론, 야권에서도 그를 구원투수로 영입하기 위해 경쟁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현 단계에선 ‘5룡’이 앞서 나가고 있다. 나머지 ‘4룡’이나 잠룡들도 정국상황에 따라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더구나 올해는 전국 규모 선거 같은 대형 정치 이벤트가 없는 관계로 잠룡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질 전망이다. 2017년 대선에서 어떤 용이 여의주를 품을지 지켜볼 일이다.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