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공개처형 목격” 그곳은 인권말살 지역

▲ <뉴시스>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평양남도 개천시에 위치한 수용소. 정식 명칭은 개천 정치범 관리소이나 북한 내에서는 ‘제14호 관리소(이하 수용소)’로 불린다. 대동강을 따라 설치돼 있는 이 수용소는 1만5천여 명이 수용돼있다고 알려진다. 14호 수용소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발생하는 인권탄압 때문이다. 북한 내 모든 수용소에서 심각한 인권탄압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제14호 수용소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다. 이 같은 내용은 해당 수용소에 수감됐던 탈북자 신동혁씨가 지난 2006년 탈북하면서 자세히 알려졌다. 북한 14호 수용소의 실상에 대해서 알아본다.

옥수수 훔쳐 총살… 20세 이상 군 간부 노리개 되기도
노동·부족한 식량·인간 이하 대우… “인권문제 심각”

북한 내 정치범 수용소 중에서 14호 수용소가 가장 악명이 높은 이유는 바로 한번 수감되면 두 번 다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14호 수용소는 주로 종신형,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수감되는 곳으로 석방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다. 14호 수용소의 크기는 서울의 1/4로 매우 크다. 그러나 이 수용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완전통제구역이다 보니 탈북자들도 실상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호 수용소에서 탈출한 두 사람으로 인해 14호 수용소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수감부터 탈출까지
눈앞에서 가족 사형당해

탈북자 신동혁씨는 14호 수용소 수감자 중 표창결혼으로 맺어진 부모에 의해 1982년 태어났다. 수감자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14호 수용소에 수감돼 탈북에 성공하기 까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수감자들은 오전 5시30분부터 탄광과 공장 등에서 노동을 한다. 어린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11세 어린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는 대로 작업장에 배치되고 아이와 부모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적다. 뿐만 아니라 수감자들은 소량의 옥수수밥과 소금국만 배급받기 때문에 항상 굶주리게 된다. 신 씨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가족과의 정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자신의 밥을 먹으려고 하자 때렸다”고 밝혔다.

신 씨는 14세에 어머니와 형이 공개처형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어머니와 형이 탈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 씨가 직접 간수에게 신고를 한 것이다. 그러자 간수는 신 씨에게 어머니와 형이 살인을 했다는 내용의 종이를 보여주며 손도장을 찍으라고 시켰다. 그는 내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손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형은 신 씨와 아버지는 물론 수용소 수감자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교수형과 총살을 당했다. 신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어떻게 엄마를 신고하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수용소에서 그렇게 배웠고 옳은 행동이라고 느낀다. 그곳에서는 모두 똑같은 죄수다.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용소 간수들은 수감자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옥수수 5알을 몰래 훔친 5세 소녀가 총살을 당하기도 하고, 신 씨 자신은 재봉틀을 떨어트렸다는 이유로 세 번째 손가락의 첫마디가 잘렸다. 혹독한 생활을 견디다 못한 신 씨는 탈출을 감행했다. 1999년 1차시도 실패로 그는 3일 만에 붙잡혀 수용소로 돌아왔다. 농장, 탄광 등에서 하루 종일 노역을 하고 먹는 음식은 옥수수, 배추, 소금죽이 전부였다. 2000년 신 씨는 2차 탈출을 감행했다. 중국으로 건너가는 것은 성공했지만 약 6개월 만에 다시 체포, 북한으로 송환됐다. 다시 돌아온 신 씨는 불 고문, 손톱 뽑기 등의 고문을 당했다. 그러다 2005년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신 씨가 직접 겪은 14호 수용소의 참혹한 실상은 그의 저서 <세상 밖으로 나오다>와 다큐멘터리 <14호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으로 인해 알려지게 됐다. 그의 진술에 일부 거짓이 섞여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그가 직접 겪은 14호 수용소의 잔혹함은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알밤 주웠다고 총살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14호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가 탈출한 사람은 신 씨 말고 한 명이 더 있다. 바로 1998년 탈북한 김용씨다. 국가안전보위부 무역국에서 일하던 김 씨는 1993년 체포됐다. 체포 이유는 부친이 미국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안보위에 침입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 씨는 부친의 얼굴은 물론 이 같은 사실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심문관들에게 끌려가 3개월 동안 갖가지 고문을 당하고 14호 수용소로 이송됐다. 5개나 되는 감시 초소를 통과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간수는 김 씨에게 “꿇어앉고 머리 박아”라고 호통 쳤다. 그리고 구둣발로 김 씨의 머리를 짓밟았다. 김 씨는 “14호 수용소에서는 간수가 눈앞에 있거나 지나갈 때 손을 뒤로 얹고 뒤돌아서 이마가 땅에 닿게 꿇어앉아 있어야했다”며 “그들이 지나간 다음 지나간 쪽은 보지 말고 반대쪽만 보고 가야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씨가 강제노역을 하게 된 곳은 밤나무골로 가을에는 산골짝에 밤알들이 수북이 쌓였다. 그러나 굶주린 수감자들에게 밤알은 그림의 떡이었다. 산에 한 발자국이라도 올라가면 ‘도주했다’고 여기고 즉결처형 당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견인차를 운전하던 운전공 앞에 밤알 몇 알이 굴러 내려왔다. 운전공은 차를 세우고 밤알을 줍다가 간수에게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김 씨는 지하에서 일하다가 간수에게 총 손잡이로 머리를 맞아 상처를 입기도 했다. 또 14호 수용소에서 여성 수감자들은 평양에서 고위 간부가 내려오면 성노리개로 조롱받다가 처형당했다.  

이처럼 처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김 씨는 1995년 18호 수용소로 이송됐다. 이때 김 씨는 14호 수용소에서 보고들은 것을 한마디라도 발설하는 경우 처형당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김 씨는 수기에서 “14호 수용소에 비하면 18호 수용소는 천국 같았다”고 회상했다. 18호 수용소는 방송과 신문을 볼 수 있고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도 있었다. 또 한 달에 30원을 내면 산에 올라가 산나물도 뜯어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도 수용소였다. 어느 수용자가 가진 담배종이에 김일성 이름이 크게 적혀있는 것을 발견한 간수가 그를 폭행하고 영하 15도의 날씨에 외부 나무에 24시간가량 묶어 놨다. 그 수감자는 온몸에 동상을 입었다. 결국 김 씨는 탈출을 결심하고 두만강을 넘는 데 성공했다.

“14호 수용소 탈출 불가능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김 씨는 14호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가 18호 수용소로 이송된 뒤 탈출에 성공했다. 반면 신 씨는 14호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신 씨의 진술에서 거짓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신 씨는 “14호 수용소에서 탈출한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정치범수용소 피해자가족협회는 “처음부터 신 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14호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며 “신 씨가 국내보다 해외에서 활동한 이유는 들통 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신 씨가 겪었다는 14호 수용소의 실상을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곳에 수감됐던 김 씨의 진술이 있다. 14호 수용소도 존재하고 있다. 북한 인권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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