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이수영 기자의 리얼스토리 “22명 죽인 연쇄살인범, 당국이 죄 묻어줬다”

범인이 촬영한 피해자의 마지막 모습(위) 당시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

1983년 새해벽두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전국을 충격에 밀어 넣었다. 살아있는 여인에게 독약을 먹이고 죽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이동식(당시 42세)의 범행수법은 경악을 넘어 공포 그 자체였다. 범행 3년여 만인 86년 6월 범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수사착수부터 검거까지 전 과정에 직접 뛰어들었던 서기만 경위(전 남부경찰서 강력반장)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죽음의 사진작가’에게 희생된 더 많은 피해자들의 한(恨)을 풀어주지 못한 탓이다.

지난 97년 12월 32년간의 경찰생활을 마감한 서 경위는 최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충격적인 비화를 털어놓았다. 범인 이동식이 무려 22명의 여성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연쇄살인범이자 사이코패스라는 것이다. 경찰수사발표에는 이동식의 여죄 여부가 포함되지 않았었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그의 살인혐의는 단 한 건 뿐이라는 얘기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동식의 또 다른 범죄행각이 국가권력에 의해 묻혀버렸다는 점이다. 사건이 ‘해외토픽’ 등을 통해 외신을 타자 당국이 국가위신을 문제 삼아 수사 중단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범인이 사형당하고 20여년의 긴 시간이 지났지만 서 경위의 자책감은 여전하다.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와 그 유족들 앞에 면목이 없다며 한숨을 쉬는 그. 1983년 1월 그곳에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1983년 1월 14일 이동식은 내연관계였던 김모(당시 24세)여인에게 “누드사진을 찍어주겠다”며 경기도 시흥의 야산으로 유인, 독살했다. 그는 극약을 먹고 괴로워하는 김 여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여인의 숨이 끊어지자 이동식은 피해자의 옷을 모두 벗기고 누드촬영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김 여인의 마지막 순간은 총 21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당시 언론은 이동식을 ‘사탄의 사진작가’ ‘변태 사진작가’ 등으로 칭하며 대서특필했다.


‘시체 흉내’ 강요

경찰발표와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동식은 경력 7년의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다. 모 사진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몇 차례 입상경력도 있는 그는 주로 여인의 누드를 찍었다. 월 27만원 정도를 버는 보일러 배관공으로 일했지만 당시 시가 150만원이 넘는 고급 카메라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작품 욕심이 많았다.

“이게 당시 이동식 집에서 압수한 사진들입니다.”

착잡한 표정의 서 경위는 기자에게 두툼한 서류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낡은 봉투를 열자 찍은 지 오래돼 보이는 사진 수백 장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 속엔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여인의 나체가 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짙은 화장에 긴 속눈썹을 붙인 미인이었지만 하나같이 시체를 연상케 하는 기괴한 포즈 탓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입가에 피를 쏟으며 하얀 천을 씌운 관 위에 엎드린 모습, 가슴에 과도가 꽂힌 채 피 범벅이 된 모습, 목을 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혀를 빼 문 모습 등등 사진 속 여인은 살아있음에도 죽은 자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죽음은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살인과 시신 촬영을 감행한 이동식의 정신병적 집착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서 경위의 설명이다.

“(사진 속 여인은)이동식의 두 번째 처입니다. 슬하에 아들 둘을 키우고 남편의 전처소생까지 품을 정도로 성실한 여자였지요. 지나치게 순진한 탓에 이런 변태적인 요구도 묵묵히 따를 만큼 순종한 게 흠이라면 흠일까.”

부인을 상대로 한 이동식의 변태 행각은 상상을 초월했다. 부인의 체모를 모두 깨끗이 정리한 것은 기본이고 여성 중요부위에 이물질을 넣은 모습까지 사진으로 남겼다. 노골적인 성교장면을 기록한 사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동식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죽음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아내를 모델로 한 ‘연출된 죽음’에 식상함을 느낀 그가 진짜 희생양을 고른 것은 예고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범행 나흘 뒤인 1월 18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김 여인의 시신이 덤불 속에서 발견됐다. 사건을 접수한 경찰은 500명이 넘는 피해자 주변 인물을 탐문한 끝에 이동식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서울 가락동 집을 급습, 그를 체포한 서 경위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중 16장 찍을 때까지 살아있었다”

“피해자의 행적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모두 종합했을 때 이동식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 아니, 확실한 범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결정적인 물증을 잡는 것이었지요. 특수절도와 횡령 등 전과 4범인 녀석은 한마디로 거짓말에는 도가 튼 범죄꾼이었습니다. 순순히 살인을 인정할 리 없었지요.”

이동식의 집과 일터인 보일러 가게를 압수수색하며 형사들은 결정적인 단서이자 충격적인 물증을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숨진 김 여인의 사진과 이동식의 일기장이었다. 범인이 아내를 모델로 찍은 수백 장의 음란 사진도 고스란히 확보됐다.

사진학계 최고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홍순택 당시 신구대 교수의 증언도 한 몫 했다. 시간 순으로 나열한 21장의 사진에서 홍 교수는 “1~16번 사진까지는 김 여인의 생전 모습이며 이후 사진은 숨진 상태”라고 분석한 것이다.

충격적인 진실은 속속 드러났지만 사건은 끝난 게 아니었다. 얼굴색하나 바뀌지 않고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는 범인을 옭아매려면 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바로 필름 원본이었다.

“피해자의 마지막을 담은 사진 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명확한 살인혐의를 입증하려면 사진의 원본, 그러니까 원판 필름을 꼭 찾아야 했습니다.”

경찰 조사 내내 이동식은 일말의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오늘날 흔히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정신병질자의 전형이었다고 서 경위는 회상했다. 그런 범인과 나흘 동안 엄청난 신경전을 벌인 끝에 “숙직실 벽 합판을 뜯어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동식의 말대로 10cm 정도 두께의 숙직실 벽을 뜯자 숨겨둔 원판 필름이 수북하게 쏟아져 나왔다. ‘죽음의 사진작가’가 촬영한 회심 작, 그 원본이었다.


비밀수첩에…”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였지만 이동식은 연쇄살인범이 아니다. 적어도 경찰의 공식수사발표에 따르면 말이다. 그러나 서 경위는 그를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지목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입수한 범인의 ‘비밀수첩’에 더욱 충격적인 범행이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동식이 검거 직전까지 쓴 일기장이 있습니다. 그 일기를 보면 녀석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요. 이걸 토대로 여죄를 추궁하니 역시 자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검찰에 송치하기 직전까지 녀석이 내게 실토한 피해자가 무려 22명이나 됐지요. 김 여인 뿐 아니라 희생자가 21명이나 더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엔 오랫동안 행방불명 상태였던 이동식의 전처도 포함됐습니다.”

서 경위에 따르면 문제의 수첩엔 뜻을 알 수 없는 시(詩)가 잔뜩 쓰여 있었다. 가족 등 다른 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일종의 암호로 작성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는 희생자의 유해를 토막 냈음을 짐작하게 하는 문구도 있다고 서 경위는 조심스럽게 전했다.

“처음엔 뜬 구름 잡는 시인 줄 알았는데 녀석과 이야기를 해보니 모두 자신의 살인계획을 정리해둔 것이었습니다. 다시 놈을 족쳐 나머지 희생자들의 유해라도 찾아야 했습니다.”

특히 검거되기 10여 년 전 이혼한 전처 B여인의 생사 여부는 반드시 밝혀야 할 숙제였다. 혹시나 여동생이 험한 꼴을 당했을까 B여인의 오빠는 직접 수사팀을 찾아와 하소연하기도 했다. 마침내 이동식은 살해한 전 부인의 시신을 버린 곳을 서 경위에게 털어놓았다.

“곧장 동료들과 함께 현장으로 뛰쳐나갔지요. 유해 발굴에 필요한 장비며 인력까지 싹 동원했는데 난데없는 복병이 나타난 겁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서 경위는 말문을 이었다. 그 내용은 참으로 충격적이고 서글펐다.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해외토픽’으로 외신에 소개된 게 문제였습니다. ‘더 이상 나라망신 시킬 수 없다’며 사건을 빨리 종결하라는 상부의 명이 떨어진 거지요. 그나마 다행인 건 발굴 현장에서 시신이 안 나왔다는 겁니다. 이동식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많지만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담당 수사팀 자체가 해체됐으니 말입니다.”

인터뷰 말미 서 경위는 착잡한 얼굴로 기자에게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열쇠고리에 매달린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장식품이었다. 마치 사람의 귀를 잘라놓은 듯한 모양의 그것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했다.

“이동식이 검찰에 송치되기 직전 제게 준 겁니다. 월남에 전투부대로 파병됐을 때도 이걸 지니고 있어서 목숨을 부지했다더군요. ‘아주 귀한 것이니 잘 지니고 있으라’던 녀석의 목소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혹시 이게 사람의 신체 일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지나친 기우일까요?”


#리얼스토리 talk box

일명 ‘남부서 까치독사’…한번 잡힌 범죄꾼 끝까지 파헤쳐
2007년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프로파일링 참여


서기만 경위

지난 97년 서울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 강력반장을 끝으로 은퇴한 서기만 경위. 그는 현역 시절 일명 ‘까치독사’로 통했다. 한 번 물면 범인이 완전히 기진맥진 할 때까지 자백을 받아내고 여죄를 파헤친 까닭이다. 현직 마지막 날까지 몸담았던 금천경찰서의 경우회를 이끌고 있는 서 경위는 금천서 전신인 남부경찰서 수사형사들의 모임인 ‘남수회’의 대표이기도하다. 은퇴 뒤인 지닌 2007년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프로파일링에도 참여할 만큼 그는 “형사로서의 감각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 서울시경을 비롯해 다른 일선서 경력도 많다. 그럼에도 남부서에 남다른 애착을 갖는 이유는?
▲ 사건을 많이 다뤄봐야 수사 실력이 는다. 구로공단을 관할로 둔 남부서는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얼추 10만이 넘는 공장 노동자가 한 곳에 모이다보니 하룻밤에 구속영장만 163건을 신청하는 날도 있었다. 폭행, 절도, 살인까지 갖가지 사건들이 밀려들어오는 이곳에 내 젊은 시절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은 당시 붙들려온 피의자들의 땀 냄새까지 그리워질 정도다.

-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곁에서 지켜본 증인이다.
▲ 화성 사건 때는 남부서 형사시절 최중락(당시 인천시경 형사과장) 반장님의 부름을 받고 수사에 투입됐다. 당시는 전국에서 ‘난다 긴다’하는 형사들이 모두 화성으로 불려오는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수개월 간 3평도 채 안되는 여인숙에서 형사 4명이 숙식을 해결하며 수사에만 매달렸다. 결과가 좋았다면 후회나 아쉬움이 없겠지만 그 사건이 어떻게 됐는지는 잘 알지 않나. 지금은 그쪽으로는 오줌도 누기 싫을 정도(?)로 진절머리가 난다.
2007년 경기 서남부 사건은 현직에 있는 후배들이 은퇴한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참여하게 됐다. 나와 김원배 연구관 등 원로 형사들이 현장을 둘러보며 표창원 경찰대 교수 등을 도와 범인 프로파일링을 진행했다. (경기 서남부 사건은 각각 정성현, 강호순 등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다보면 ‘미제’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법도 한데.
▲ 사실 미제사건은 범인이 똑똑해서라기보다 수사팀이 ‘무딜’ 때 생긴다. 항상 유력한 용의자는 나오지만 범인이라 단정 지을 단서나 자백을 빨리 얻어야 한다. 수사원칙 중 ‘1·3·5·7·9’라는 게 있다. 사건 발생 하루, 사흘, 닷새, 일주일… 이런 식으로 시간이 갈수록 단서나 자백을 얻기 어렵다. 내 경우 은퇴 직전 마지막으로 담당한 살인사건이 미제가 됐다. 술집 접대부가 잔인하게 살해됐는데 유력한 용의자가 있었다. ‘내 식대로’ 용의자를 처리했다면 분명히 해결될 사건이었지만 은퇴날짜가 겹치면서 후배들 손에 맡겼다. 그 결과 사건은 범인 없는 살인극이 됐다. 피해자와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내 실수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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