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30일은 자유 월남의 수도 사이공(호치밍으로 개명)이 월맹 공산군에 의해 1975년 함락된 지 40년이 된 날이다. 베트남 공산당 정권은 매년 4월30일을 “해방의 날”이라며 승전기념행사를 벌여왔다. 올해는 40주년이라는 데서 더욱 성대했다.

그러나 상당수 베트남인들은 무관심 내지 냉소적이다. 특히 인터넷의 블로그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실린 글들은 정부가 “해방”이란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해방”이 아니라 “비참한 빈곤” “부패” “권력 남용”만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17세 때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미국에 정착했다가 15년 후 다시 베트남으로 영구 귀국한 57세 응구엔 퀴 덕 씨의 신문 칼럼이 주목된다. 하노이에서 미술상을 경영하는 응구엔 씨는 4월3일자 미국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에 ‘누구를 위한 베트남 전쟁인가?’ 제하의 논평을 썼다. 그는 베트남 정부가 사이공 함락을 “해방”이라고 선전하는데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베트남 정권이 월남을 점령하고 사회주의를 강요함으로써 월남 주민들에게 “해방”을 선사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빈곤”, “부패”, “권력 남용”의 굴레를 씌웠다고 했다. “해방” 아니고 “실패”라고 규정했다.

오늘날 베트남 젊은 세대는 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치른 희생보다는 당시 자유분방했던 자본주의 사이공에 더 관심을 둔다. 베트남의 웹사이트는 적화되기 전 사이공 시민들이 즐겨 입던 산뜻하고 멋진 패션 의상들을 소개한다. 오토바이를 타는 젊은이들은 월남전 때 미국 군인들이 사용하던 모양의 헬멧을 즐겨 쓴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미국에서 발행된 화보 주간지 라이프(Life) 같은 잡지들에 실렸던 화려한 사진들을 다시 옮겨 싣기도 한다.

물론 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을 펴 시장경제로 들어가 중국처럼 경제를 개방하면서 크게 나아지고 있다. 하지만 작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아직도 3788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해 우리나라 1인당 GNI는 2만8189달러였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적화혁명 기치 아래 자본주의 체제를 말살하고 “사회주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며 20년 가까이 전쟁에 빠져들었다. 1950년대에는 월남·프랑스와 전쟁했고 1960-70년대엔 월남·미국과 처절하게 싸웠다. 이 전쟁으로 월남에서는 41만5000명이, 월맹에서는 58만7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는 300-400만에 이른다. 미군 5만8022명이 전사했고 30만 명이 부상했다. 월남적화로 100만여 명이 해외로 탈출했고 적화 10년이 지나도록 매월 1500명이 작은 보트에 생명을 걸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들을 “보트 피플”이라고 했고 상당수는 남지나해 거친 파도에 전복돼 생명을 잃거나 태국 해적의 약탈 먹이가 되기도 했다.

월맹은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20년 전쟁 끝에 월남을 적화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이 적화혁명의 대가로 얻은 것은 “사회주의 낙원”이 아니었다. “공산당 독재 탄압”과 “비참한 빈곤”뿐이었다. 결국 베트남 공산 정권은 “인민의 착취도구”라며 몰아냈던 자본주의를 구원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다. 공산주의자들이 내거는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낙원” 구호가 전부 기만이었음을 사이공 함락 40년은 증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는 북한의 6.25 기습 남침을 “해방 전쟁” “맥아더는 원수”라고 외쳐대는 종북분자들이 꿈틀댄다. 6.25 남침 때 대한민국도 월남처럼 적화되었더라면, 지금쯤 우리 모두는 북한 김정은 지배하에 “참혹한 빈곤” “권력 남용” “부패”로 신음할 게 분명하다. 사이공 함락 40주년에 즈음해 자유민주체제의 소중함을 다시금 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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