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절망보다 무서운 병…극단적 살해 도 서슴치않아”

‘사랑해서 놓아준다’는 건 옛말?

지난달 23일 젊은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이 대구의 한 아파트 복도를 울렸다. 아버지에 의해 발견된 피해 여성 A씨(21)는 온 몸을 흉기로 난자당한 채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A씨를 공격한 범인은 남자친구 B씨(26). 이별통보에 낙담한 그는 피해자를 살해한 직후 이 아파트 14층에서 투신자살했다. 3년의 열애는 살인과 자살이라는 최악의 비극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최근 결별에 앙심을 품고 전 애인을 상대로 ‘몹쓸 짓’을 하는 범죄자들의 면면이 언론지상을 채우고 있다. 감금과 폭행은 다반사고 강간, 심지어 살인까지 ‘무서운 애인들’의 범죄 수위는 점점 높아가는 추세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참지 못하고 범행을 저지른 이들의 변명은 한결같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 2007년 옛 애인에게 “은밀한 동영상을 퍼트리겠다”는 협박과 폭행을 당한 인기가수 아이비의 사건도 잘못된 집착이 낳은 비극이었다. 최근엔 연예인뿐 아니라 일반인도 집착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온 몸 불타면서도 피해자 쫓아

2007년 9월 충격적인 사건 현장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한 남성이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한 여성을 맹렬히 추격하는 CCTV 화면이었다. 짝사랑하던 여인이 고백을 받아주지 않자 저지른 참극이었다.

이날 민모(42·여)씨는 직장동료인 김모(47)씨가 “추석선물을 주겠다”는 말에 따라 나섰다 봉변을 당했다. 평소 김씨가 자신을 짝사랑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받아주지 않은 민씨는 ‘마지막으로 담판을 짓자’는 말에 김씨를 따라 나섰다 사건에 휘말렸다.

인근 모텔로 민씨를 끌고 간 그는 민씨와 자신의 몸에 시너를 뿌리곤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함께 죽자”며 라이터를 꺼냈다. 당황한 민씨가 말리기도 전에 그는 라이터를 당겼고 순식간에 불덩어리가 됐다. 김씨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결국 숨졌다.

결별에 대한 앙갚음을 위해 치밀하게 범죄 계획을 짠 경우도 있다. 지난해 10월 손모(여·37)씨는 남자친구 신모(41)씨에게 납치됐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신씨는 친동생까지 부추겨 애인의 납치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을 담당한 경북 영덕경찰서 관계자는 “가해자는 피해 여성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옷을 모두 벗기고 흉기를 준비하는 등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이런 짓을 하고도 ‘사랑해서 그랬다’니 말이 되느냐”며 혀를 찼다.

사건 당사자인 피해자 손씨의 심정은 더욱 절박하다. 생업까지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힌 그는 “(집에 돌아와) 일주일 동안은 잠 한숨 못 잤다. 사람 만나는 게 무섭다. 한때 나 자신처럼 믿었던 사람이라 공포가 더하다”고 토로했다.


‘도망 갈까봐’ 정사 장면 촬영

애인의 알몸과 정사장면을 찍어 협박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지난해 명문대를 졸업하고 언론사 입사를 준비 중인 최모(24·여)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마추어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했던 최씨는 같은 멤버였던 가수 지망생 이모(30)씨와 지난 2년 간 교제했다. 준수한 외모에 유머 감각까지 갖춘 이씨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최씨는 졸업을 맞아 그와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한 달 전 이별을 고했다. 평소 술을 좋아하는 남자친구의 주사가 극도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최씨는 “헤어지기 두 달 전엔 시간이 늦어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가 험한 꼴을 당했다. 침대에 묶여 두 시간여 동안 죽도록 맞았다”고 말했다. 그의 손목엔 험악한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친구들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남자친구 곁을 떠났지만 최씨는 더 큰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최씨의 ‘은밀한 사생활’을 손에 쥐고 돌아올 것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씨는 “(이씨가) 어느 날 휴대폰카메라로 정사 장면을 촬영했다. 황당해서 이런 걸 왜 찍느냐고 따지자 ‘널 너무 좋아하는데 혹시 도망 갈까봐 찍는다’고 하더라”며 “그땐 농담인줄 알았는데 이제 사실이 됐다”며 울먹였다.

한편 지난해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된 여성이 최소 7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09년 한 해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다. 그나마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는 제외한 수치다.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폭력 가해자가 남편이나 남자친구인 사건 82건 중 살해된 여성은 70명이었다. 이중 46명은 남편에 의해, 24명은 남자친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자녀, 친정부모 등 아내의 가족이 살해된 경우도 16명이나 됐다.

이 같은 수치는 지난 수년 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흔히 말하는 사랑싸움이 이미 ‘목숨싸움’이 돼버린 셈이다. 이는 우리 주변에 사랑을 넘어선 ‘집착의 병자’가 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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