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 은행 지급보증서로 30억 사기 “영화보다 기막힌 솜씨”

위조된 HSBC 은행 지급보증서

부녀 사기단이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중소기업 대표 7명에게 위조된 은행 지급 보증서를 발급해주고 수수료 명목으로 29억 7000만 원을 받아 챙긴 이씨에 대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이씨를 도운 딸(28)을 지난 6일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은 독일에 금융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HSBC 은행에 약 300억 달러(42조 원)를 예치한 재력가 행세를 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부녀의 기막힌 국제금융 사기사건의 실체를 알아본다.

금융투자회사 ‘EBII’ 대표 이씨는 지난해 10월 1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특급 호텔 연회장에서 행사를 열었다. 300억 달러를 HSBC 은행에 예치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당시 행사에는 국내·외 중소기업대표와 독일교민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이씨 부녀는 타고난 사기꾼 기질을 십분 발휘, 타고난 언변으로 참석자들을 현혹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다.


받아 챙긴 수수료만 약 30억 원

이씨는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 대표들의 애로사항을 절묘하게 이용했다.

이씨는 “국제신용 등급이 높은 HSBC 은행의 지급 보증서를 은행에 제출하면 이를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며 HSBC 은행 지급 보증서 발행을 약속했다. 더구나 이 행사에서 이씨는 무담보로 HSBC 은행 지급 보증서를 발행받아 자금을 대출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씨의 제안은 대출한도나 담보능력 부족 등으로 자금난을 겪던 중소기업들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이씨는 이와 함께 수수료 명목으로 지급 보증서 액면가의 1%(5억~10억 원)를 요구했다. 이를 통해 총 7명의 중소기업대표에게 수수료 명목으로 총 29억 7000여만 원을 가로챘다.

은행 지급 보증서는 굉장히 정교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은행 관계자들까지 진위 여부를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국제 은행 간 컴퓨터 전산망 거래인 S.W.F.T 코드 및 은행 코드 번호를 감쪽같이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위조 지급 보증서는 모두 602장으로 액면가만 42조 원에 달했다.

이씨 부녀는 경찰조사에서 “HSBC 은행에 예치한 약 300억 달러는 인도네시아사업가가 예치한 것이다. 지급 보증서도 그를 통해 받았다”면서 “절대 위조가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경찰은 “이들이 2008년부터 1년여 간 독일에서 거주했다. 독일어는 물론 영어도 거의 구사하지 못 했다. 외국어에 서툰 이들이 위조지급 보증서를 직접 위조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며 “이들이 독일에 설립한 금융투자회사 ‘EBII’는 독일 금융감독위원회에 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기행각 추궁에 모르쇠 일관

이씨의 사기 행각은 교묘했다.

이씨는 사기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은행 지급 보증서의 수혜자를 딸 명의로 기재했다. 다시 말해 수혜자인 이씨의 딸이 동행하지 않으면 피해자들이 지급 보증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거나 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들의 사기행각은 결국 피해자 A씨에 의해 발각됐다. A씨는 위조된 지급 보증서를 가지고 B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다. B은행은 발행은행인 HSBC에 지급보증서에 대한 진위여부를 문의했고, 이 보증서가 위조된 사실을 확인했다. A씨는 그제서야 이씨 부녀에게 사기를 당한 사실을 깨닫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사기가 발각된 사실을 모르고 여권 만료로 국내에 입국한 이씨를 체포했다. 이씨는 경찰에서 ‘위조된 것이 아니다’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조사에서 이씨는 “30여 억 원 모두 지급 보증서 발급 비용과 경비 명목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이들 부녀가 사기로 가로챈 30여 억 원의 행방을 찾고 있지만, 이들이 밝히지 않고 있어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은 “이씨는 굉장히 능글맞은 성격이다. 조사 내내 위조하지 않았다고 잡아뗐다. 그러다 조사가 끝나자 ‘다 안고 가렵니다’라고 뻔뻔한 말을 했다. 전형적인 사기꾼이다”이라고 전했다.

또한 경찰은 “사업계획은 있으나 자금이 없어 고통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의 허점을 노린 범죄다”며 “향후 지분 수익으로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수법에 다수에 중소기업이 속아 넘아갔다. 일부 피해자의 경우 아직도 사기 당한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이들이 2007년경부터 범행을 시도한 정황을 포착, 국제공조수사를 통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금융계 큰손 행세… 실제로는 13평 거주

이씨 부녀는 인터넷 블로그 마케팅을 통해 피해자들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블로그 등을 통해 이씨 부녀가 국제 금융계의 거물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지인들을 소개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블로그에는 300억 달러 유치 홍보 문건과 고급 호텔에서 열린 투자 유치 축하 행사 사진 등이 개제되어 있었다. 또 독일의 대저택과 독일 본사 빌딩을 구입했다며 빌딩 사진을 올려 부를 과시했다. 또 자신들이 워렌버핏, 빌게이츠 등과 함께 세계 4위 부자라고 하는 등 블로그 상에 허무맹랑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해외라 아직 모든 조사를 마무리하지는 못했으나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이씨 부녀의 현란한 말솜씨에 피해자들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고 말했다.

이씨 부녀는 이미 동유럽 몬데테그로에 자본금 2유로(약 3600원)로 ‘밀레니엄 뱅크 그룹’이라는 유사 은행을 설립해 사기를 친 수배자였다. 이들은 경찰수배를 피해 독일로 도피한 후 또 다시 금융사기행각을 벌인 것이었다.

이씨 부녀의 사생활은 더욱 복잡했다. 고급 호텔에서 머물면서 사람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벌였지만, 실제로는 서울 변두리 42m²(13평)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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