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니까 폭력을 이해해야?

[일요서울 | 조아라 기자] 최근 인터넷 상에는 ‘안전이별’이라는 신조어가 자주 언급된다. ‘안전이별 축하해요’, ‘안전이별 다행이네요’라는 식의 용례로 쓰인다. 이 단어는 사랑했던 사람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헤어진 상황을 가리킨다. 일부에서는 안전이별을 두고 “한국남자의 비정상적인 속내 때문에 만들어진 단어”라고 설명한다. 여자 친구를 자신의 소유물이자 자신의 엄마로 생각하는 비상식적인 심리 때문에 안전하지 못한 이별이 발생한다고 꼬집었다. ‘안전이별’이라는 신조어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데이트 폭력 문제를 상기시킨다. 
 
신체·언어·정신적 폭력…심하면 납치·감금까지 
솜방망이 처벌…최근 5년간 피해자만 3만여 명
 
# 증거는 제가 맞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거나 본 사람 이외에는 없습니다. (중략) 저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지속된 한윤형 씨와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데이트 폭력을 당해왔습니다. 
 
주된 폭행 장소는 한윤형 씨의 자취방이었습니다. 본격적인 폭력은 2009년 정도부터 시작됐습니다. (중략) 최초의 징조는 2009년 이맘때쯤, 한윤형 씨가 저와 언쟁하던 중 휴대전화를 길거리에 집어던지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도망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을 거라 여겼습니다. 다음 날 그는 자신이 보인 폭력적인 언행에 대해 사과하였습니다만 그런 일은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이윽고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저에게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 박가분과는 아마 12년 중반 정도에 몇 달간 연애를 했었는데, 사실 그와의 연애는 제게 있어 치가 떨리게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중략) 기분에 따라 남들에 대한 고려 없이 과격해지는 언행과, 화가 나면 주위에 있는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의 폭력적인 행동들, 욕설이나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폭력성과 어떤 이유로 화가 나는지도 추측이 불가능한 부분 등 그는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폭력적이었고 저는 제가 그간 사귀었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그와의 관계에서 공포를 많이 느꼈습니다. 
 
최근 데이트 폭력 사례를 폭로하는 글이 잇따르고 있다. 피해 여성들은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과거를 폭로했다고 전했다. 
 
평소 진보적 논객으로 알려진 두 사람이었기에 논란은 더욱 커졌다. 한윤형은 자신의 SNS에 “모든 상황에 대해 사과드린다. 피해자가 겪었을 고통을 이해하고 저 자신을 깊게 성찰하겠다. 진지하게 자숙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썼다. 
 
박가분은 “혐의내용에 대한 반박을 떠나서 물의를 일으킨 과정에서 저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을 갖겠습니다”며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장직을 사퇴했다. 
 
연이은 폭로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데이트폭력 문제를 다시금 수면위로 끌어 올렸다. 한국여성의전화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데이트 폭력 상담건수는 414건이다. 그 중 피해자는 20대(57건, 26.5%)가, 가해자는 30대(28건, 13%)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10대 피해자도 전체의 3.3%를 차지했다.
 
전통적 性역할 강요
데이트 폭력 심화시켜
 
데이트 폭력의 원인은 전통적 성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남성은 적극적이고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점, 여성은 순종적이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연인관계에서 강요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서로 다른 점은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이를 통제하려 하면서 폭력성이 발현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다보니 피해자들은 ‘사랑하니까 폭력을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앞세워 가해자들은 관계를 유지하고 상대방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이화영 소장은 “이러한 논리는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방법”이라며 “관계 유지를 위해, 상대방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데이트 폭력은 복합적인 형태의 폭력을 수반하는 특징이 있다. 단순 성폭력이 아니라 신체적 폭력, 언어 정신적 폭력, 납치·감금·경제적 폭력까지 다 연결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리상태, 개인정보 등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폭력의 정도는 심각하다 볼 수 있다. 
 
데이트 폭력은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는 폭력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일상적인 침해로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여성의전화 자료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의 피해유형은 정서적 폭력이 81.9%로 가장 높다. 이어 신체적 폭력(52.1%), 성적 폭력(38.6%), 경제적 폭력(11.6%)이 뒤를 이었다. 
 
이 중 두 가지 이상 유형의 폭력이 발생한 경험은 5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트 관계의 특성상 가해자와의 관계유지 기간이 길어질수록 관계의 밀도, 즉 상호의존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별통보 시 ‘스토킹’
5년 새 290명 목숨 잃어
 
관계의 특수성은 스토킹 범죄로 이어질 확률을 높인다. 데이트 폭력 피해자 대부분은 관계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부터 가해자와 이별을 시도한다. 하지만 가해자는 피해자의 대응에 따라 폭력의 내용과 형태를 변형하며 관계 중단 의지를 좌절시킨다. 이 과정에서 스토킹 범죄가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스토킹은 관계 단절을 원하는 피해자의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피해자가 자신의 협박과 요구에 반응할 때까지 괴롭힘을 멈추지 않는다. 피해자의 가족이나 지인에 대한 위협, 자살협박 시도, 성관계 사진이나 영상 등을 유포하겠다는 협박 등이 지속되면 피해자는 두려움에 가해자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화영 소장은 “가해자는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며 “이로 인해 피해자는 점점 고립되며 폭력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데이트 폭력 등 폭행치사로 목숨을 잃는 사례도 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애인관계인 사람으로부터 폭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사람은 3만6362명으로 확인됐다. 이 중 목숨을 잃은 피해자도 290명에 이른다. 
 
제도 외면에 피해자 고립
인식변화·처벌 강화 필요
 
데이트 폭력에 관한 사회적 관심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자신이 데이트폭력의 피해자임을 밝히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데이트 폭력은 연인 간의 사랑싸움, 애정문제처럼 사소하고 경미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피해자의 구조요청으로 경찰이 출동하고도 가해자가 ‘연인관계’라고 말하면 별다른 제재조치 없이 가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데이트 폭력 문제를 개인의 의지와 선택으로만 보는 시각도 여전하다. 가해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심리적·사회적 맥락은 무시된 채 폭력 피해자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문제를 돌리기 때문이다. 
 
특히 미혼여성의 경우 혼인관계가 아닌 ‘남’이니 헤어지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제도권 밖의 관계이기 때문에 더 취약한 상황에 놓인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여성의 성경험에 대한 차별적, 이중적 기준이 작동하는 사회 안에서 비혼 여성의 동거사실이나 성경험은 협박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로 인해 피해사실을 드러냄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례도 적지 않다.
 
현재의 처벌로는 데이트 폭력을 근절시키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데이트 폭력에 대한 처분은 통상적인 폭력범과 동일하게 처벌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도 신체적 폭행, 강간, 특수강간이 있을 시에만 처벌할 수 있다. 
 
데이트 폭력은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이고 장기간 데이트 폭력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또 ‘데이트 관계’였다는 사실이 피해사실을 희석시키고, 가해자의 폭력이 정당화되거나 은폐되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해자가 본질을 왜곡하며 피해자를 쌍방폭행, 명예훼손, 협박 등으로 고소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데이트 폭력은 밀폐된 공간에서 가해자와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며 “경찰신고는 피해자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가해자를 엄벌하고 피해여성 보호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스토킹의 경우 박근혜 정부에서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하지만 범칙 금액이 8만 원에 불과하다. 2013년 이후 이 법으로 처벌된 경우는 503명뿐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낙연 의원이 발의한 ‘스토킹 처벌 및 피해자보호에 관한 법률안’과 정의당 김제남 의원이 발의한 ‘스토킹방지법’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문제는 이 법안도 스토킹범죄의 정의가 협소하고 보호처분 위주라는 점에서 제대로 스토킹 범죄를 처벌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측은 “스토킹 범죄는 살인까지 갈 수 있는 위험한 범죄행위”라며 “스토킹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피해자 보호를 위한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특례법은 지난 2월 국회에 발의됐다. 
 
여성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경찰의 체포우선주의 도입과 피해자 신변보호책 마련 등을 제안하고 있다. 
 
가해자가 현장에서 체포될 시 재범률이 현저히 감소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따라서 현재의 격리, 100m이내 접근금지와 같은 긴급임시조치를 넘어서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피해자가 신고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복폭행 가능성이 높은 만큼 피해자 신변보호를 위한 정책이 함께 마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여성의전화 이화영 소장은 “폭력이나 폭력적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 될 수 없다”며 “폭력이 발생하고 이별여부를 결정하는 힘의 관계가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의지와 선택을 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데이트 폭력은 ‘폭력’의 문제고 사회적 범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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