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전 숨겨진 진실 밝힌다

 DJ정권, 북한 눈치보느라 장례식도 불참
북한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서해교전’으로 기록

[일요서울 | 특별취재팀] 2002년 6월 29일. 그날은 한일 월드컵 결승전을 하루 앞둔 토요일이었다.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을 9시간 앞두고 온 국민이 월드컵 축제에 들떠있던 그 시각, 북한 경비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여 꽃게잡이 어선 조업통제와 경계임무를 수행 중이던 대한민국 해군 함정 참수리 357호에 기습적으로 포탄을 퍼부었다. ‘제2 연평해전’이었다.

2002년 6월 29일, 서해바다 최전방 해역은 갑자기 포성과 총성이 울리는 전쟁터로 변했다.

온 국민이 월드컵에 신경 쓰던 그 시각에 우리 해군 장병들은 생과 사를 넘나들며 우리의 바다를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북한 함정의 기습사격으로 시작된 전투였기에 객관적으로 불리한 상황. 그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북방한계선(NLL)을 지키기 위해 불굴의 투혼으로 공격에 온몸으로 맞섰다. 제2 연평해전의 승전 뒤에는 총탄이 빗발치고 화염이 타오르는 바다에서 목숨을 바쳐 NLL을 사수한 서해의 영웅들이 있다.
고 윤영하 소령(이하 전사자는 추서계급, 부상자는 당시 계급 기준)은 정장으로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부하들과 함께했다. 조국의 바다를 지키고자 아버지를 따라 대를 이어 해군장교가 된 참수리 357호정 정장 고 윤소령은 적함의 집중표적이 돼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도 자신의 임무를 다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키를 놓지 않았던 고 한상국 중사의 불멸의 투혼도 잊을 수 없다.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로 함포의 방아쇠를 당겼던 고 조천형 중사와 고 황도현 중사도 그날의 영웅이다. 자기 몸을 은폐하기도 힘든 함정 갑판 한가운데 서서 적을 향해 응전 사격 중 산화한 고 서후원 중사도 있다.

‘너만은 살리고 싶다’는 담당 군의관의 너무도 간절한 바람을 뒤로한 채 3개월의 투병 끝에 저 세상으로 떠난 고 박동혁 병장은 우리 모두를 슬픔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날 박병장이 적의 총탄으로 중상을 입고도 부상당한 전우들을 구하려 애썼던 그 아름다운 전우애를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 여섯 명 전사자의 고귀한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 해군은 NLL을 침범한 북한 함정을 격퇴하고 우리의 바다를 지켜낼 수 있었다. 비록 생과 사의 길은 달리 했으나 부상자들의 투혼 또한 치열했다. 부장 이희완 중위는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심각한 부상 속에서도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정장을 대신해 중상을 입은 상태임에도 교전이 끝날 때까지 부하들을 독려하며 끝까지 지휘했던 이중위의 투혼은 영원히 우리 해군 장병의 귀감이 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왼쪽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상태에서도 한 손으로 탄창을 갈아 끼우며 사격을 멈추지 않았던 권기형 상병, 적의 사격 속에도 위험에 처한 부하를 향해 자신의 몸을 날린 이철규 중사, 적의 선제공격으로 40mm포의 전원장치가 손상되자 즉각 수동사격으로 전환, 적을 향해 사격을 퍼부은 황창규 중사 등 참수리 357호정의 대원 모두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해 조국의 바다를 지켜냈다.

참수리 357호정 장병들은 지휘관이 전사하고 부장이 부상당한 극한 상황에서도 평상시 훈련했던 것처럼 필승의 전투 의지로 최후의 순간까지 사력을 다해 싸우는 군인정신과 전우애를 보여줬다. 그들은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혼, 하나로 뭉쳐진 전우애가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 줬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장병들 모두가 그날의 영웅인 것이다.

6인의 영웅들 모습은 이제 해군의 각급 교육기관에 흉상으로 설치돼 장병들의 사표로 자리 잡게 됐다. 적이 기습적으로 쏟아내는 포격의 탄우 속에서도 생명을 다하며 용감히 현장을 지휘했던 고 윤영하 소령의 흉상은 모교인 해군사관학교 생도사 명예홀에서 후배 생도들과 함께하고 있다. 참수리 357호정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뒤늦게 인양돼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고 한상국 중사의 흉상은 교육사 전투병과학교에 자리 잡았다.

또 적의 기습공격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며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적을 향해 방아쇠를 잡았던 고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 등 3인의 흉상은 교육사 기술병과학교 부사관 생활관에 모셨다. 의무병으로 적탄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부상당한 전우들을 구하다 전상을 입고 치료 중 숨진 고 박동혁 병장의 흉상은 교육사 기초군사학교에 설치돼 영원히 후배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됐다.

불의의 기습사격으로 가슴 아픈 희생을 감수해야 했지만, 우리 해군 장병들은 기필코 우리의 바다를 지켜낸 것이다. 이 해전은 한때 서해교전으로 불렸으나 2007년 ‘승전’으로 그 성격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지난 4월 8일 ‘제2 연평해전’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357호정은 적의 기습공격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끝나는 순간까지 의연히 바다 위에서 버텨냈지만 기지로 귀환 중 안타깝게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침몰 53일 만인 8월 21일 성공적으로 인양된 357호정은 그 후 평택에 있는 해군2함대로 옮겨졌다. 이제 2함대 영내 안보 공원에 자리 잡은 357호정은 그날의 아픔과 투혼을 잊지 않고 승리를 다짐하기 위한 기념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정부 당국은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먼 산 보듯 했다.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숨져간 여섯 해군 용사들의 영결식장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합참의장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교전 하루 만인 6월 30일 유유자적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日王)과 함께 한일 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하고 7월 2일 귀국했다.

햇볕정책 아래 대북 유화책만을 강조한 김대중 정부는 조국을 위해 죽어간 그들의 넋조차 제대로 기리지 않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고귀한 피를 흘렸는데도 좌파정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들의 희생을 모른척했다. 한때는 추모식조차 없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DJ정부는 북한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승전의 의미를 담은 해전 대신 ‘서해교전’으로 이를 기록했다.

이제 서해의 영웅들은 단순히 추모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그들은 해군 장병들과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 필승의 표상으로 각인돼 있다.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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