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영 전략…‘실용정신’ ‘주권의식’, ‘자주국방’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이 즉위(1418)한 때는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한 지 26년 째 되는 해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북쪽으로는 세계 최대 강대국이었던 명(明)과 여진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영토적 야심에 불타는 왜가 있었다. 조선 스스로 바로 서지 않으면 영구히 자주성을 상실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15세기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 정책을 펼치고 여진, 왜, 유규 등과는 교린 관계를 유지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종(祖宗)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는 대원칙을 세웠다. 그 아래 문무를 겸한 ‘실용정신’과 확고한 ‘주권의식’, 그리고 튼튼한 ‘자주국방’의 국가경영 전략을 세웠다. 군사적 독립성과 역량만이 나라의 주체성을 지켜줄 수 있는 지표였다.

조선은 여진과 왜와의 관계에서 우위의 입장에 있었고, 경제 문화적으로도 그들보다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진과 왜는 항상 조선의 국력이 약해지거나 국내 정치상황이 혼란해질 경우를 틈타 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런 국제상황에서 세종대왕은 화약과 화포의 제작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봉수대 완비, 병선의 개발, 병서의 간행 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울였으며, 명나라·여진·왜와의 외교적 관계에 진력(盡力)했다.

첫째, 명나라와의 관계는 ‘조공 면제’ 전략을 전개했다.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명 황제에게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進獻),예물을 바침)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심한 것을 들어 명나라에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조공 면제 요청은 1430년(세종 12년)에 말(馬)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둘째, 여진과의 관계는 무역소를 설치하는 회유책과 진·보를 설치하는 강경책을 쓰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써 여진의 힘이 강화되는 것을 막았다. 나아가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 우리 민족으로 동화시켰다. 두만강 유역은 김종서가 ‘동북6진’(1432)을, 압록강 유역은 최윤덕·이천이 ‘서북4군’(1433)을 설치하여 여진에 대비했다.

이로써 발해 멸망 이후 축소되었던 영토가 다시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이곳에 남쪽의 백성들을 북쪽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1433)’을 실시하여 오늘의 국경선을 형성했다.

셋째, 왜와의 관계는 초기에는 삼포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1419년)하게 했다. 이후 대마도 도주(島主)의 요청으로 삼포를 개항(1426년)하였다. 이는 노략질을 근
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 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이렇듯 세종대왕은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여진과 왜라는 눈에 가시 같은 안보의 위협적인 존재들을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사용하여 조선을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창조의 바다’였던 세종대왕의 위대함은 혼자 가지 않고 신하들과 함께 ‘동행’했다는 점이다. 모든 공을 신하들에게 돌리는 도량을 발휘한 세종대왕의 32년 치세는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이라 불렸다. 그는 임종할 때 국가 원훈들을 모아 놓고 “압록강·두만강은 나의 생명선이니 지켜 달라”며 승하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의 안위만을 걱정한 것이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250년을, 명·청나라는 300년을 넘지 못했다. 세종의 애국·호국정신이 조선을 27대 519년까지 유지할 수 있게 한 정신적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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