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신중하·정경선…부친 그늘 벗나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조용한 행보를 보이던 재벌황태자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정중동(靜中動) 행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정중동은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후계구도 확정과 관련해 아직 시기상 이르다는 주변의 시선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각자의 회사에서 승계를 위한 경영수업이 한창이다. 최근에 근황이 알려지고 있는 정기선 상무(현대중공업)·신중하 대리(교보생명) 또한 조용한 행보 속에서 경영에 한 발 더 다가가고 있다.


임원 아닌 평사원부터 시작…조금 이른 승진 직원과의 벽 허물어
따가운 눈총 보이던 시민단체들도 지적 아닌 훈계의 시선으로 바라봐


이들은 다른 재벌가 자제들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적게 받던 인물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일선에 나선 것은 맞지만 수년간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한 행보를 이어갔다.

여전히 전면에 나서기보다 조용한 행보를 보여 이들에 대한 경영승계가 사실상 마무리 됐거나 최종 단계에 오른 것 아니냐는 반응이 많다. 특히 이들은 각자의 회사 최고 행사에 얼굴을 알리면서 조만간 그룹의 얼굴로 등장한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는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기선 현대중공업그룹 상무다. 정 상무는 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인 정몽준 전 새누리당 대표와 김영명 예올 이사장 부부의 2남2녀 중 장남이다. 정 상무는 현재 울산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서울 사무소에 가끔 온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언제 오고 갔는지는 서울사무소 직원들도 잘 모른다.

그만큼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최근 공식석상에 나온 것은 지난 15일 울산대학교에서 열린 ‘울산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김기현 울산광역시장, 최길선 현대중공업 회장, 권오갑 사장 등 15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 정 상무도 참석했다. 전면에 나서는 등의 행보는 하지 않았지만 오너 일가를 대표해 대통령을 맞이한 것은 사실이다. 이날 행보를 두고 재계 역시 정 상무가 천전히 존재감과 위상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꼽는다. 

정 상무는 2009년 현대중공업에 대리로 입사했으나 반 년 만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수료하고 2011년 돌아온 그는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지사 컨설턴트로 1년 9개월 동안 근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 상무의 국내 복귀 여부에 대한 반응은 남달랐으나 2013년 초부터 그룹 내외에서 복귀 소문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해 6월 13일 현대중공업 울산 본사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첫 출근을 했다. 한 해 뒤인 2014년 10월 그룹 정기임원인사에서 그는 상무보를 뛰어넘어 상무로 승진해 임원진에 이름을 올렸다. 현대중공업에서 오너 일가가 임원이 된 것은 정 전 대표가 회장에서 물러난 1989년 이후 25년 만이다. 현재 그의 직함은 안전·경영지원본부 상무다.

조용히 입사
현장수업 받아

교보생명에서도 3세 경영승계 움직임이 포착됐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의 장남 신중하씨가 지난 5월 교보생명 자회사인 KCA손해사정에 대리로 입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신중하씨는 지분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 후계구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평가돼 왔다. 여전히 아버지 신창재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힘을 쓰고 있는 데다 신중하씨 역시 외국계 금융사인  크레딧스위스 서울지점에 근무하고 있어 교보생명 입사는 당분간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업계는 내다봤다.

그러나 신중하 씨가 최근 자회사에 입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신창재 회장이 승계를 위해 경영수업 시키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전부”라면서 “일각에서는 그런 해석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제 갓 대리로 입사한 상황에서 경영 수업이나 승계작업 같은 얘기까지 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현재 교보생명 최대 주주는 지분 33.78%를 보유한 신창재 회장이며, 특수관계인으로 사촌동생인 신인채 필링크 사장이 2.5%, 누나인 신영애 씨가 1.4%, 신경애 씨가 1.7%를 보유하고 있다. 신중하·신중현 형제와 신창재 회장이 2013년 22세 연하와의 재혼으로 얻은 딸 박지영 씨도 교보생명 지분이 전혀 없다.

여기에 신창재 회장이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녀의 경영권 승계 관련 질문에 “우리 회사는 구멍가게가 아니다. 시기가 된다면 내 자녀든 아니든 유능하고 준비된 사람이 경영에 나설 것”이라고 답한 바 있는 만큼 교보생명의 후계구도는 당분간 수면 아래에 있을 전망이다. 하지만 신중하 씨의 조용한 행보가 결국엔 왕좌를 얻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신창재 회장이 18년간 의사생활을 하다 교보생명을 맡은 만큼 타 업종에서 일하는 아들 또한 교보생명에 입사 후 경영수업을 통해 후계구도를 완성해나가지 않겠느냐"고 분석한다.

정몽윤 현대해상의 장남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도 사회적 기업을 만들려는 젊은이들을 지원하며 정중동 행보를 하고 있다.

정씨는 지난 4월 현대해상의 지분을 추가 취득해 0.22%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2006년 5월부터 현대해상의 지분을 꾸준히 늘려왔다.
현대해상의 최대주주는 정 회장으로 21.9%를 보유하고 있다.

시민단체들도 처음부터 임원으로 입사한 것이 아니라 평사원으로 입사해 오랜 기간 실무경험을 쌓는 재벌 자제들이 늘어나면서 따가운 눈총이 아닌 훈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부 이들의 빠른 승진에 대해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한편 그동안 조용한 행보로 아버지 그늘에서 톡톡히 경영수업을 받던 이경하 부회장은 최근 인사에서 회사의 대표 얼굴로 승격했다. 30년 만에 왕위에 등극한 것이다. 반세기 그룹을 이끌어온 아버지 이종호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JW홀딩스는 지난달 21일 이사회를 열어 이 회장의 승진과 함께 박구서 JW홀딩스 사장과 박종전 JW생명과학 사장을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 발령하는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고 22일 밝혔다.

JW홀딩스 신임 대표에는 전재광 전무가, JW생명과학 대표에는 차성남 JW중외제약 부사장이 선임됐다.
이 신임 회장은 이종호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해 1986년 JW중외제약에 입사했다. 이후 30여 년 만에 회장으로 승진했다. 이 회장은 지역 영업담당부터 시작해 마케팅·연구개발 등 다양한 부서를 거쳤으며 2001년 JW중외제약 사장을 맡아 그룹 경영 전반을 총괄했으며 2009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skycros@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