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정책 추진해 전쟁의 폐해를 극복’ 상소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광해군은 후금(後金·淸)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인조는 주변의 국제정세와 너무나 동떨어진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씀으로써 정묘호란(1627년)을 초래하고, 병자호란(1636〜1637년) 때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굴욕을 당하고 만다.

최명길(崔鳴吉,1586~1647)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를 배척하는 척화파에 맞서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를 대표하여 실리적 외교정책을 추진하여 존망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인물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정묘호란의 외침을 당하고도 부국강병을 외면했다. 그 결과 청 태종은 1636년 12월1일 12만 대군을 심양에 모아 조선 침입에 나섰다. 인조는 피신할 겨를도 없었다. 한양이 청군의 손에 떨어진 12월 14일, 최명길은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적에게 출병의 이유를 묻는 등 시간을 버는 사이 인조는 도성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텼지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인조는 최명길의 ‘주화론’으로 종묘와 사직을 보존할 수밖에 없었다.

1637년 1월18일,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항복문서를 초안했다. “(전략) 황제께서 끝내 노여움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군사의 힘으로 다스리신다면 소방(小邦)은 말길이 끊어지고 기력이 다하여 스스로 갇혀서 죽을 수밖에 없으니, 천명을 이미 받들어 운영하시는 황제께서 시체로 가득 찬 이 작은 성을 취하신들 그것을 어찌 패왕의 사업이라 하겠나이까. (중략) 하늘과 사람이 함께 귀의하는 곳(天人所歸)에 소방 또한 의지하려 하오니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백성에게 유시를 내렸다. “내가 천성이 용렬하고 어두워 정치의 요체를 몰랐다. 합당한 정치를 펴려다 도리어 혼란으로 몰고 갔으니 대군이 몰려오기도 전에 나라는 이미 병들었다. 나라는 반드시 자신이 먼저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친다는 옛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조의 참담한 고백에는 국방과 외교에 무능했던 뼈저린 후회와 자책이서려 있다. 최명길은 청나라에 항복했던 일을 자괴(自愧)하고 있는 인조를 위로하는 한편, 개혁정책을 추진하여 전쟁의 폐해를 극복할 것을 상소하였다.

“가령 전하께서 융통성 없이 필부의 절개를 지키셨더라면 종묘사직은 멸망했을 것이고 백성들도 다 죽었을 것입니다. 조정의 의견을 받아들이시고 백성들의 바람을 따르시니, 하루 안에 위기가 변하여 종묘사직의 혈식(血食, 나라를 보존함)을 연장하게 되고 살아 있는 생명이 어육(魚肉)됨을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뜻을 안으로 세우고 덕을 몸에 닦아서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며 기강을 세워서 밝히고도 정치와 교화가 펴지지 않고 백성들의 비방이 멈추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략)”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은 실리와 명분에 입각해 항복문서를 초안했고, 그 항복문서를 찢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이 달랐던 두 사람은 후일 심양의 감옥에서 만나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한다.  

김상헌은 ‘양대(兩代)의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을 푼다’는 시를 읊고, 최명길은 화답하여 ‘그대 마음 돌과 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道)는 고리와 같아 믿음에 따라 돈다’고 했다. 척화론자인 이경여는 두 충신의 우국충절에 대하여 시를 지어 기렸다.

“두 어른 경(經)ㆍ권(權)이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이니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 이제야 원만히 마음이 합치는 곳, 남관(南館)의 두 노인 모두가 백발일세”

최명길의 종전(終戰) 협상력이 김상헌의 강경론이 배후 작용을 함으로써 힘을 받아 조선 측 주장이 관철될 수 있었다는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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