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권한 제한하는 제도·장치 도입 주장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고려 서른네 명의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군인 성종(成宗)을 도와 고려의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른 제도정비에 이바지한 유학자요, 명재상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경애왕(景哀王, 재위:924〜927)을 죽였던 해(927년)에 경주 최씨의 시조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손자 최은함(崔殷含, 신라 6두품)의 아들로 경주에서 태어났다.

최승로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유학자 출신의 재상이다. 그의 삶은 긴 기다림과 짧은 활동기로 요약된다. 그의 기다림은 성종 때 ‘시무28조’로 꽃피웠고, 5년 동안 열매를 맺으니, 비로소 고려왕조 500년의 기틀이 잡혔다. 고려왕조는 숭불정책을 썼지만, 국가경영의 기조는 초기부터 유교이념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유교사상에 입각해 정치개혁을 모색한 일은 최치원의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최치원의 개혁 시도는 신라의 골품제라는 낡은 틀에 얽매여 빛을 보지 못했는데, 마침내 자신의 증손(曾孫) 최승로를 통해 고려 건국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그 열매를 맺게 된다.

최승로의 일생은 거란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원수의 나라인 금(金)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다시 몽골제국의 재상을 역임한 중국 역사상 가장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인 야율초재(耶律楚材)와 비슷하다. 또한 그의 업적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鄭道傳)에 비견된다.

고려가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마련하고 국가 기반이 확립된 것은 제 6대왕 성종(成宗, 재위:981~997) 때였다. 성종은 즉위 직후 충과 효로서 나라를 다스리겠다며 유교적 통치를 선언하였다. 성종의 치세(治世)동안 고려는 지방제도 및 중앙관제를 정비하였으며,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 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이른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을 성종(成宗, 1457~1494)이라 했듯이, 고려의 성종 역시 그런 호칭에 걸맞은 군주였다.

통일신라 때부터 신라 6두품을 비롯한 지식인들 사이에선 최치원, 최승우처럼 도당(渡唐) 유학을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최승로는 유학 한번 안 간 순수한 국내파로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가 ‘시무 28조’를 통해 훈신숙청에 대하여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중국풍을 좋아한 광종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도 학문적 자존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최승로는 통일된 국가, 분열이 없는 국가, 통치권이 바로 선 국가, 즉 중앙집권적 유교 국가체제 건설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고려사≫ <최승로 열전>에서 ‘고려를 다스리는 근본’을 불교가 아닌 유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불교를 수신(修身)의 근본으로, 유교를 치국(治國)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불교를 숭상하는 사람은 다만 내생(來生)의 인과(因果)를 심는 것이므로 현재 이익이 되는 것은 적습니다. 이에 살펴보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요결(要訣)은 그곳에 없는 듯합니다. 또한 3교(三敎, 유교·불교·도교)는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지고 행하므로, 이것을 혼합하여 하나로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유학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근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내생(來生)의 구원을 찾는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현재의 임무입니다. 현재는 가까운 것인 반면 내생은 먼 것입니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최승로는 5대 왕에 대한 평가와 함께 28조에 달하는 시무책을 성종에게 올렸다. ‘시무28조’ 개혁안은 정치·경제·국방·문화·사회·행정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각종 제도와 장치를 도입하자는 부분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개혁안을 성종은 그대로 수용했다. 성종 이후 고려는 법과 제도에 따라 국사가 처리되었고, 최승로의 등장 이후 고려는 본격적인 문치(文治) 사회로 접어들었다.

988년(성종7)에 최승로는 종1품 문하수시중에 올랐다. 이때 최승로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이듬해 989년(성종8). 최승로는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최승로의 부음이 전해지자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太師) 벼슬을 추증했다.

공자는 사회발전을 세 단계로 제시했다. 첫 번째인 ‘온포(溫飽)’는 백성들이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는 수준의 사회다. 두 번째인 ‘소강(小康)사회’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의 질이 보장된 사회다. 하나라 우왕(禹王), 은나라 탕왕(湯王), 주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주공(周公)이 다스리던 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마지막 ‘대동(大同)사회’는 무위지치(無爲之治)로 표현되는 요순(堯舜)시대의 이상향을 말한다. ‘대동사회’가 으뜸가는 최선의 사회라면 ‘소강사회’는 버금가는 차선의 사회다.

최승로가 꿈꿨던 고려도 공자가 “예의를 벼리로 삼아서(禮義以爲紀), 군신 사이가 바르게 되고, 부자(父子)가 돈독하게 되고, 형제가 화목하고 부부가 조화를 이룬다”고 설명한 ‘소강사회’를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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