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의 ‘계이자시’… ‘고려사열전’ 해동공자 칭호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최충(崔沖, 984~1068)은 문종대 고려 유학을 꽃피운 학교 교육의 아버지요, 명재상이다.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칭송되었던 그가 세운 9재학당(九齋學堂)은 사학교육의 원조였고, 고려시대 문신 배출의 산실이었다. 본관은 해주, 호는 성재(惺齋), 자는 호연(浩然),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최충은 984년 황해도 대령군(大寧郡, 해주)에서 향리(호장)였던 최온(崔溫)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최온은 해주최씨의 시조로 해주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다. 문장으로도 명성이 높았고, 뒤에 판사부사를 지냈다. 조선 세종 때 최만리(崔萬理)는 최충의 12대손이다.

최충은 좌습유를 시작으로 한림학사·간의대부 등을 역임했으며 동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62세에 문하시중이 되었다. 최충은 관료생활 동안 목종·현종·덕종·정종(靖宗)문종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겼다. 최충은 현종 4년(1013)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이 되어 감수국사 최항을 도와 ≪칠대실록≫을 편찬했다.

최승로가 교육개혁을 통해 유교적 정치개혁에 공헌한 인물이라면, 60년 후 태어난 최충은 유교적 소양을 구비한 인물을 배출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성종의 과감한 개혁정책이 ‘시무 28조’를 건의한 최승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려 최고의 황금기를 이끈 11대 왕 문종(文宗, 재위:1046~1083)의 업적은 최충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종 대는 최충의 시대이기도 했다.

1053년(문종7) 최충은 나이가 일흔이 되자 재상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느끼고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요청하자, 문종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시중(侍中) 최충은 여러 대에 걸쳐 가장 뛰어난 유학의 종장(宗匠, 경학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이었으며, 삼한의 덕을 이룬 사람이다. 지금 비록 늙어서 물러나기를 청하지만 차마 이를 허락할 수 없다. 해당 관청에서는 옛 법도를 살펴 그에게 안석(安席, 방석)과 궤장(지팡이)을 내려주고 일을 보게 하라.”

문종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를 결심한 최충은 문종 9년(1055) 7월에야 비로서 사직할 수 있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일흔두 살이었다. 이 때 문종은 다시금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진 신하를 얻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요(堯)임금은 여덟 명의 인재를 중용했고, 선비를 얻는 나라는 융성했던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주나라 왕실에서는 네 명의 현인을 맞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재상자리를 주고 그들의 충직한 계책을 채납(採納, 의견을 받아들임)하여 왕정을 빛나게 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현명한 보좌를 받아 임금의 지모를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바로 다스리고 평화롭게 만들었으며 영원무궁한 국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현철한 옛사람에 견줄 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짐은 그런 사람을 얻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듯 최충을 존경한 문종은 최충이 퇴직한 후에도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자문을 구했다. 최충은 50년에 걸친 벼슬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후진양성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고려사≫ 열전에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최충에 비롯하여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최충은 교육에 쏟은 공이 컸다. 최충이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듣게 된 이유는 공자처럼 9재(九齋)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사학은 최충이 후진양성을 위해 세운 ‘9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 ‘9재학당’에서는 국자감과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실시했다.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 과거 시험관)를 역임한 최충의 명성을 듣고 학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특히 과거지망생들이 많이 모여들어 과거 응시를 위한 예비학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9재학당이 성황을 이루자 지공거를 지낸 유학자들이 각기 이와 유사한 11개의 사학을 개경에 개설, 9재를 포함하여 12도(知貢擧)라 했는데, 이로 인해 관학은 더욱 위축되고 사학이 교육의 중심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2공도는 설립자의 시호나 벼슬을 따 이름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최충의 문헌공도가 단연 으뜸이었고 가장 성했다.

은퇴 후 10여 년 동안은 후진양성과 사학 발전에 매진한 최충은 1068년(문종22) 9월 15일에 개경에서 8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훗날 최충은 ‘문헌’이라는 시호와 함께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고려의 이제현(李齊賢)과 조선의 서거정(徐居正)은 최충을 이렇게 극찬했다.
“우리나라의 문물이 더욱 성하고 이로부터 뛰어난 문사가 많이 나와 중국에서조차 ‘시서(詩書)의 나라’로 일컬어져 지금에 이른 것은 오로지 최충의 덕택이다.”

최충은 평소 두 아들 최유선(崔惟善)과 최유길(崔惟吉)에게 유훈(遺訓)을 내렸다. ‘계이자시(戒二子詩)’는 권력보다는 학문의 길에 종사하라는 내용으로 해주최씨의 정신적 규범이 되고 있다.

“선비가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하면 끝을 잘 맺기 어렵지만, 글로써 출세하면 반드시 경사가 있게 된다. 나는 다행히 글로써 현달하였거니와 깨끗한 지조로써 세상을 끝마치려 한다. (중략) 청렴하고 검소함을 몸에 새기고 문장으로 한 몸을 수놓아라. (중략) 문장은 비단이요 덕행은 구슬이라. 오늘 이르는 말을 뒷날 잊지 않으면, 나라의 기둥이 되어 길이 흥창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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