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와 전라도, 언제부터 앙숙이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세 번째로 ‘성왕과 진흥왕’편이다.

 

신라와 백제가 벌인 관산성전투에서 신라는 대승하였지만 백제는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좌평 4인과 병사 2만 9600명이 전사할 정도였다. 사상자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대규모의 전투였으며 실제로 백제는 왕이 직접 출전할 만큼 총력을 기울였다.

이 전투는 양국 간의 이해관계로 벌어졌지만 그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었다. 5세기 광개토대왕·장수왕대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고구려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력수왕대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고구려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력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문자명왕대에는 신라·백제 등과 싸웠으나 번번이 패했다. 그만큼 고구려가 약해진 것이었다. 또 양원왕이 여덟 살에 즉위한 후 어린 왕을 둘러싼 귀족들의 암투가 극심해졌다.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로 혼란하였는데 이 틈을 타 고구려의 북방에 돌궐이 쳐들어오고 백제와는 불편한 관계가 되는 등 고구려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백제는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실시하자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비유왕,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그 이듬해 신라에 좋은 말 두 필과 흰 기러기를 보냈다. 그러자 신라에서도 황금으로 만든 구슬을 보내옴으로써 동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수왕 63년,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한 후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왕의 죽음으로 왕권이 떨어진 틈을 타 세력을 잡은 것은 왕비족인 해씨였다. 병관좌평이었던 해구는 결국 문주왕을 살해하고 13세이던 문주왕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다. 그가 곧 삼근왕이었으나,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해씨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자 전 왕비족인 진씨 세력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진씨세력의 진남과 진노는 해구를 제거하였다.

그 뒤를 이은 동성왕은 왕비족이 앞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막고 신라와 동맹을 공공히 하고자 신라왕족인 비지의 딸과 혼인하였다. 또 종래의 귀족 대신 연씨·백씨·사씨와 같은 신흥귀족을 등용하고 지방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하여 왕족 22명을 담로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흥귀족인 백가가 권력을 함부로 하자, 동성왕은 그를 가림성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백가는 오히려 자객을 보내 왕을 살해하였다.

동성왕 다음은 무령왕이었다. 그는 우선 백가를 토벌하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고구려의 침략을 몇 차례 막아내었다. 무령왕은 중국의 양나라에게 영동대장군이란 작위를 받았고 백제는 중국의 역사책에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할 만큼 국력이 신장하였다.

다음으로 즉위한 성왕은 성왕 16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겼다. 크게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수도 자체가 광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 백제의 뿌리를 찾아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하고 겸익과 같은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강화하려 하였다. 외교문제도 소홀히 하지 않아, 양나라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왜국에도 문물을 전달해주었다.

백제의 든든한 힘이 될 우방을 만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에 빼앗겼던 땅을 되찾는 일. 성왕은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성왕 18년 백제는 고구려의 우산성을 쳐서 패하였으나, 26년에 고구려가 넘어오자 신라와 공동작전을 펴 격파하였다. 성황 28년에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다음 해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즈음 신라도 전성기가 한창이었다. 한반도 동남쪽 구석이라는 지리적 환경 탓에 신라는 지증왕대에 뒤늦게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지증왕은 우경을 장려하여 농업 생산성을 증대시켰다. ‘서라벌’이라는 국호도 ‘신라’로 바꾸고 ‘마립간’이라 하던 칭호도 ‘왕’으로 바꾼 것이 이때이다. 그리고 법흥왕대에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더욱 다졌다. 그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법에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였다. 또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도 사용하였는데 곧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법흥왕, 불교를 공인하여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체제정비를 꾀하였으며 밖으로는 영토를 넓혀 19년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

뒤이어 법흥왕의 조카인 진흥왕이 7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처음은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으나 진흥왕 12년부터 직접 정치를 시작하며 ‘개국’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새롭게 나라를 여는 마음으로 국정에 임하겠다는 각오였다.

싸움 틈타 이득 얻은 신라

진흥왕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영토 확장이었다. 진흥왕 11년 백제와 고구려가 싸우는 틈을 타서 그는 이사부를 파견하여 백제가 함락시켰던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했다.

다음 해에는 돌궐이 고구려를 쳐들어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칠부 등 8장군을 보내 고구려의 10성을 차지했다. 이 작전을 위해 진흥왕은 직접 낭성까지 행차하였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신라가 영토를 넓히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와 백제는 공동작전을 펴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군단을 배치하였다.

이에 백제는 성왕의 딸을 신라에 보냈다. 땅을 빼앗긴 백제가 왜 왕녀를 보냈을까. 이는 신라를 방심시켜놓고 보복, 반격할 시간적 여유를 얻고자 함이었다. 신라는 백제를 무시할 수 없어 왕녀를 제2비로 삼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있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결국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양국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성왕의 아들 여창은 백제와 가야·왜의 연합군을 지휘하여 관산성 근처의 구타모라에 요새를 세우고 왜군을 지휘하여 왜군의 선봉대가 화공작전을 벌여 관산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놀란 신라는 북쪽 신주의 군주 김무력의 군대를 동원하고 전국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관산성을 되찾으려 하였다. 그러던 중 성왕이 직접 전쟁터에 온다는 말이 들리자 간첩을 보내 어디로 쳐들어올지 알아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삼년산군의 한 지휘관인 도도가 이끄는 복병은 성왕이 오는 길목을 차단하고 성왕을 습격하여 죽였다. 신라군은 이 여세를 몰아 관산성을 되찾는 한편 좌평 4인과 백제 군사 2만 9600명을 전사시켜 크게 이겼다. 왜 백제는 패배했고 신라는 승리했을까.

먼저 백제는 전투에 대해 왕족과 귀족의 견해가 일치하지 못했고 빈번이 전쟁을 치르고 수도를 옮기느라 대규모 토복 공사에 시달린 농민과 군사들은 피폐해 져 있었다. 반면 신라는 새로이 귀족으로 편집된 금관가야 계열 기무력의 활약과 영토 확장에 대한 진흥왕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이사부·거칠부 등과 같은 명장들의 실력 발휘가 곧 승라의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는 그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야지역을 잃었고 신진 귀족세력들이 등장해 왕권이 위축되었다. 또 신라에 대한 무리한 복수전을 되풀이하여 결국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신라는 이 전투의 승리로 가야 지역을 획득하고 큰 자신감을 얻어 함경남도 안변 근처까지 진출,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또 내부에서는 김무력 가문이 급부상해 후일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한 삼국통일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신흥 진흥왕의 한강 하류 지역 점령과 관산성전투는 오랫동안 이어온 양국간의 동맹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믿음과 신뢰가 무너진 뒤 되풀이된 복수전으로 감정의 앙금과 응어리는 게속 커져갔다.

진흥왕은 결국 나라의 영토를 넓히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그 때문에 한때의 이웃을 철천지원수로 만들어버렸다. 지금까지도 큰 문젯거리인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은 바로 신라와 백제의 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과 다툼은 많은 불행의 씨앗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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