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시스>

‘고통스러운 지역’에서 사는 주민 5천만 명 넘어
지역별 ‘부익부 빈익빈’ 좀체 완화되지 않아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미국에서 집값 땅값 생활비 비싸기로 소문난 샌프란시스코 만안지구(灣岸地區, Bay Area)에는 기술기업들(technology companies)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 동네 터줏대감 격인 구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애플, 페이스북, 에버노트(메모용 스마트폰 앱을 출시한 회사), 스탠퍼드 대학, 버클리 대학, 그리고 신생기업 1만 곳이 이웃하고 있다. 그리고 이 넓지 않은 장소로 엄청난 돈이 몰린다. 거리 곳곳에 일류 은행, 밴처캐피털이 진을 치고 있다. 이들 모두가 기다리고 노리는 것은 오직 하나다. ‘다음에 터질 큰 것 한 방’이다. 이래서 미국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회의 땅’이라고 부른다.

‘직업의 지리학’을 쓴 노동경제학자 엔리코 모레티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 교수는 이 책에서 “당신이 누구냐가 아니라 어디 사느냐에 따라 당신의 소득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모레티 교수는 ‘돈을 못 써서 안달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도박과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는 고급 호텔의 웨이터가 여섯 자리 연소득(10만 달러, 즉 우리 돈 1억 원 이상)을 올린다고 소개한다. 물론 정식 연봉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취객들이 던져주는 팁을 합치면 그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부자 동네에 살아야 한다.

미국 지역별 빈부격차 분석
‘종합보고서’ 발간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식 응집(凝集)의 놀라운 효과’를 실증분석을 통해 밝힌다. 샌프란시스코건 보스턴이건 뉴욕이건 가릴 것 없이 지식, 특히 첨단과학 지식으로 무장한 고급인력이 몰려 있는 곳에서는 생명공학 전문가인 ‘갑(甲)’이 전자공학 박사 ‘을(乙)’, 그리고 경영학 박사 ‘병(丙)’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하는 엄청난 ‘대박’ 사업을 성사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인재들이 몰려있는 곳에서는 떡볶이 가게를 차리든 치킨집을 열든 ‘구매력이 왕성한 고급인력’이 고객으로 미어터지는 덕분에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덕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모레티의 결론이다.

모레티 교수가 2012년에 낸 저서에서 밝힌 이런 내용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학술적 결과물이 최근 발표됐다.
미국의 지역별 경제 격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보고서가 공개된 것이다. 2008~20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경제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지역별 명암이 뚜렷하며, 실업·빈곤·재정불안 등으로 경제적 고통이 심한 지역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이 50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요지다.

워싱턴 DC연구기관인 경제혁신그룹(Economic Innovation Group·EIG)은 각 지역이 겪고 있는 경제적 고통의 정도를 일별할 수 있는 자료를 최근 공개했다. 이 자료는 대침체(Great Recession) 여파에서 회복한 미국 인구 99%에 해당하는 2만5000개 이상의 우편번호를 조사했다. 이 자료는, 역사적으로 더 번성하는 지역(그 대부분은 현행 회복 과정에서 번영하고 있다)과 금융위기 이래 실제로 경제 여건이 더 나빠지고 가난해진 지역 사이의 벌어지는 격차를 보여준다.

EIG연구팀은 우편번호별 조사결과를 종합한 다음 이를 시(市)·군(郡)·하원의원 선거구·주(州)별로 분류했다. 뉴저지 주 캠던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위험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인식되는데, 이번 EIG조사 결과 미국에서 가장 경제적 고통이 심한 곳으로 드러났다. 캠던에 이어 오하이오 주 영스타운, 인디애나 주 개리, 미시건 주 플린트가 고통 지수가 높았다. 대도시로는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뉴저지 주 뉴어크가 상위권에 속했다. EIG공동 설립자 겸 사무총장인 스티브 글릭먼은 보고서에 첨부한 성명에서 “미국인 수백 만 명이 계속해서 경제회복에서 내버려졌다고 느낀다”면서 “아메리칸드림의 달성이 어쩌다 그곳에 태어나게 된 우편번호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미국 통계국 자료를 분석하는 한편 주민의 학력, 임대주택 공실률, 실업률, 빈곤 정도, 중간 소득, 취업 기회, 창업에 기초해 지역별로 점수를 매겼다. 이렇게 해서 우편번호들에 0에서 10점까지 부여한 다음 하위 20%를 “고통스러운 곳”으로 정의했다. 이 최하위 우편번호 집단은 미국인 5000만 명 이상이 사는 곳이다. 이들 가운데 불균형적인 비율이 남부에 집중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남부 주들은 미국 전체 인구의 37%를 수용할 뿐이지만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미국인의 52%를 끌어안고 있다. 미시시피 주민(州民)의 40%와 앨라배마 주민의 35%는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운 우편번호에 살고 있다. 반면 메인 주민(州民)의 4%, 뉴햄프셔 주민의 2%, 버몬트 주민의 1%만이 그런 우편번호에서 산다.

워싱턴 연구소 우편번호
2만5000개 전수조사

그런가 하면, 노스다코다 주민(州民)의 50%는 번영하는 우편번호에서 살고 있으며 이 비율은 미국 주들 가운데 가장 높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번 연구에 사용된 자료는 석유 값 폭락 이전에 수집된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석유 탐사·생산 기업 종사자들의 임금이 급속하게 하락한 것이 반영되지 않았다. EIG보고서에 따르면 2010~2013년 기간에 가장 부유한 미국 우편번호 10%의 경우 임금이 22% 올랐고 창업이 11% 증가했다. 가장 빈곤한 10%의 경우 일자리가 13% 줄었고 기업체의 11%가 사실상 폐업했다. 보고서는 “회복 격차가 특히 긴급하고 급박하게 두드러진다”면서 “왜냐하면 그것은 하강 소용돌이에 갇힌 지역 주민의 복지가 계속 악화할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구증가 추세가 현행 궤도를 계속 유지한다면 그것은 특히 맞는 말이다. 가장 잘사는 우편번호들의 경우 2010~2014년 기간 중 인구가 평균 8.2% 증가한 반면 가장 못사는 지역들의 인구 증가율은 0.5%에 그쳤다. 인구증가는 일자리, 주택, 점포, 서비스에 대한 현지 수요를 자극해 지역 경제를 성장시킨다. 하지만 성장하지 않고 있는 지역이 새로운 사업체를 많이 유치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고통을 겪는 공동체들이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는 소비 지출을 의미 있게 자극할 수 없다. 종합적으로 이번 EIG 보고서는 대단히 고르지 않은 미국 경제의 지역별 회복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경제 회복세가 두드러진 곳은 북동부 해안지역, 중서부의 북부 일부, 그리고 태평양 연안의 몇몇 우편번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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