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첫사랑’의 차태현, ‘풀하우스’의 비, ‘온리유’의 조현재,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 ‘발리에서 생긴일’의 조인성…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재벌2세라는 점이다.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를 보면 대단한 집안의 자제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의 1%도 안되는 극소수층인 재벌은 드라마에서 가장 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으며, 드라마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들의 재력을 부각시키려 안간힘을 써댄다. 대리만족과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매번 비슷한 소재와 뻔한 줄거리를 다루는 ‘재벌드라마’에 대한 비판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난생 처음 떡볶이를 먹어본 재벌 손녀?”

SBS의 ‘루루공주’가 방영 첫 주만에 22%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수목 드라마의 강자로 자리잡고 있다. 현대판 ‘왕자와 공주’의 사랑을 다룬 이 드라마는 화려한 볼거리로 시청자들을 끌어모으는데 일단은 성공했다. 그러나 현실성은 배제한 채 자잘한 눈요깃거리들로 극을 채우고 있다는 혹평을 받고 있는 실태다.매번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재벌은 실제 재벌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재벌집 딸이 떡볶이를 처음 먹으며 신기해하는 식의 황당한 설정에 시청자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 네티즌들은 “재벌을 딴나라에 사는 이들인양 묘사하는 억지스런 설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재벌없는 재벌드라마”

극중에서 현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재벌2세들의 억지스런 행동은 시청자들로부터 비웃음과 질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들은 경영2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돈이면 뭐든 된다’는 듯 ‘막나가는’ 행태로 일관한다. 비싼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하고 흥청망청 돈을 써대기 일쑤. 이에 시청자들은 “드라마에는 재벌은 없고 ‘졸부’만 존재한다”며 “아무리 돈이 많다해도 돈을 물쓰듯 쓰는 이들이 과연 있겠는가”라고 비판한다. 또 “별볼일 없는 여성에게 목을 매며 사랑타령이나 하는 재벌이 과연 존재하겠느냐”는 의문도 제기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경영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경쟁기업과의 서열다툼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현실의 재벌 2세들과는 너무도 다르다”며 “풍요하게 자란 것과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목소리도 높다. 시청자들은 “재미로 보는 드라마라 해도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재벌들의 생활을 모티브로 해 단순히 눈요깃거리들로 이야기를 끌어가려는 뻔한 속셈에 채널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샐러리맨에 대한 테러죠”

외국계 금융 회사에 근무하는 정기찬(33)씨는 “재벌드라마를 보면 TV를 끄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말했다. 강남 토박이로 명문대를 졸업한 후 내로라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는 정씨지만, 드라마의 재벌 2,3세들을 보면 ‘열등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의류 회사 회장 아들, 다국적 그룹 회장 아들, 자동차 그룹 회장 아들, 리조트 회사 사장 아들 등 그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일류기업 자제들이다. 젊은 나이에 최고급 외제차를 굴리며 이사급 이상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돈을 물쓰듯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드라마임을 감안하더라도 비현실적이며 샐러리맨들에 대한 일종의 ‘테러’라는 것.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자부하는 펀드매니저 이재현(32)씨 역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백마탄 왕자’가 등장하는 스토리는 이제 지겹다. 그런 ‘팔방미인’이 과연 몇%나 존재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나름대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두 사람은 드라마를 보면서 회의를 느낄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그들의 ‘만화같은’ 일상을 보면 일에 치여 사는 자체가 비참하게 생각될 때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또 사회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재벌의 세습경영이나 혈통주의가 드라마에서는 당연한 듯 그려지고 있다는 것도 시청자들을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게 하는 주요인이라는 것. 여성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외국계회사에 근무하는 한 여성은 “재벌드라마가 어느정도 판타지를 심어주고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인정하지만 뻔한 내용을 수도없이 우려먹는데는 진절머리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여성은 매번 남성에게 도움을 받는 ‘속물’ 이나 조건좋은 남자의 눈에 들어 팔자고치는 ‘신데렐라’로 그려지는 것이 몹시 불쾌하다”고 밝혔다. 또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예쁘장한 외모만으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여성의 스토리는 다분히 성차별적인 설정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나물에 그 밥

가장 큰 문제는 드라마의 내용이 주인공만 바뀐 로맨틱 코메디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이다. 게시판에는 “재벌없이는 드라마를 못만드는가”, “언제까지 스타급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재탕, 삼탕식으로 우려먹을건가”라는 비판이 거세다. 주인공들은 부모의 후광을 업고 ‘낙하산’으로 입사해 능력과는 상관없이 고위직을 꿰차고 앉아있다.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온 이들은 가진 것 없지만 기죽지 않고 자신에게 ‘틱틱거리는’ ‘바른생활’을 하는 여자들에게 끌린다. 또 냉소적이고 반항기질이 있는 이들은 뭐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삐뚤어진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망나니’였던 이들은 정신이 똑바로 박힌 여성과 만나면서 의젓한 ‘왕자님’으로 거듭나는 것이 일반적. 오히려 오만방자하고 철없는 모습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인간다운 매력에 빠지게 하는 기제로 사용된다. 재벌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분명 흥미롭다. 재벌들의 생활을 간접경험하고 대리만족을 얻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현재의 재벌 드라마는 주 시청층이 20,30대 여성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만든 철저한 상업주의 드라마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재벌 우려먹기식의 식상하고 성의없는 드라마 전개는 멀지않아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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