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vs 제작사 전면전
편성이 확정된 프로그램이 방영 당일 방영이 보류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 5일 오후 4시40분 전파를 탈 예정이었던 STV 드라마툰 ‘달려라 고등어’가 방송사와 외주 제작사의 충돌로 방영이 연기됐다. SBS 측은 5일 “공동 외주제작사인 젤리박스, 이기진미디어 측과 SBS가 계약 조건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방송권 활용에 대한 양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유감스러운 상황에 이르게 됐다”며 “예능 프로그램 ‘헤이!헤이!헤이! 시즌 2 스페셜’을 긴급 대체 편성했다”고 밝혔다.



SBS ‘달려라 고등어’의 방송 보류사태는 최근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의 이런저런 갈등이 심심치 않게 표출되고 있는 시점에서 등장한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간의 충돌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동안 방송사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외주제작사가 자신들의 ‘권리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례이기 때문이다.

‘달려라 고등어’의 파행 사태는 제작사 젤리박스와 이기진미디어가 SBS에 ‘방송권 활용’을 과감히 요구하면서 빚어졌다. 프로그램이 시청률이 낮은 토요일 오후 4시40분에 편성된 것을 들어 SBS 외 타 채널에도 ‘달려라 고등어’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 것.

하지만 SBS가 이를 거부하면서 ‘달려라 고등어’는 시청자에게 약속했던 첫 방송일자를 지키지 못하게 됐다. SBS는 이날 ‘방송 보류’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첫방송 당일에 방송을 취소하는 결정은 제작사와의 협상 결과에 따라서 ‘달려라 고등어’의 편성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방송 관계자들은 이날 사태를 ‘방송사와 제작사의 전면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간 방송사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강압이나 다름없는 권리(제작비, 해외판권 등) 요구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수용했던 제작사가 반기를 든 셈이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출범

그동안 거대 공룡인 방송사 앞에서 외주제작사의 불만은 말그대로 불만으로만 끝나는 것이 현실이었다. 방송사로부터 편성을 따내야하는 입장에서 제작비나 해외판권 등의 부분에서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도 끝내는 방송사의 요구에 맞추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외주제작사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고, 최소한의 권리는 쟁취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외주제작사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의 출범이 대표적인 사례다. 김종학프로덕션, 이관희프로덕션, 초록뱀미디어, 올리브9, 팬 엔터테인먼트, IHQ 등 31개 TV드라마제작사가 출자해 만든 협회는 “왜곡되고 있는 지상파방송사와의 계약 불공정 등 드라마 제작시장의 불균형을 바로 잡고 드라마 한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설립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보다 앞서 SBS는 심야 음악프로그램 ‘음악공간’의 방송을 몇 주간 중단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외주제작사 권리찾기 거세질 것

외주제작을 담당하는 엠넷닷컴이 제작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방송 콘텐츠 활용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면서 결국 양측의 입장을 좁히지 못한 이유로 불과 한달 만에 같은 상황을 되풀이한 SBS는 신뢰도에 금이 갔다.

SBS ‘외과의사 봉달희’때도 이같은 분위기는 감지됐다. 이 드라마의 제작사인 DSP엔터테인먼트는 방송이 끝난 후까지도 SBS와의 제작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제작비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또 6월 방영될 MBC ‘태왕사신기’는 국내 방영권과 미주지역 동포방송 방영권은 MBC 측에서, 나머지 외국 판매에 대한 저작권은 제작사인 TSG컴퍼니가 갖는 것으로 협의 중이다. 이는 저작권에 대한 외주제작사들의 변화된 시각을 보여주는 사례다.

외주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다채널 시대에 경쟁력 있는 외주제작사의 권리찾기는 갈수록 거세질 것이며 방송사도 결국엔 이에 맞춰 변화하지 않
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주제작사들의 움직임에 대해 방송사 관계자들은 “방송사도 이익을 추구해야하는 기업으로 자선 사업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SBS가 시청자와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달려라 고등어’의 첫방송을 취소한 것 역시 외주제작사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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