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 홍대의 개척자 ‘DJ엉클’
기획 홍대 클럽문화가 정착되기까지

주말 저녁이 되면 홍대 일대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질만큼 자유롭고 화끈한 열기로 가득찬다. 홍대는 홍익대학교를 지창하는 말이지만 요즘은 홍익대학교 일대의 클럽과 카페 일대를 통털어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홍대 주변의 클럽들은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메카로 유명하며, 젊은이들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밤을 잊는다. 2001년 3월부터 시작된 ‘클럽데이(매월 마지막주 금요일)’가 되면 홍대 젊은이들의 열기는 터질 듯 고조된다. 클럽이 밀집된 홍대 일대는 그야말로 또 다른 세상을 연출하며 밤을 잊은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변한다. 홍대가 외국 못지않은 환락의 공간이 되자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틈을 타 여성들을 노리는 범죄의 온상으로도 떠올랐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를 배제하면 홍대는 강남과는 차별화 된 공간, 음악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색다른 공간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홍대의 독특한 클럽문화가 형성되기까지는 몇몇 음악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오늘날의 홍대를 만든 일명 ‘홍대 살리기 프로젝트’를 공개한다.


80년대 중반 즈음 국내에서는 디스코 문화가 유행했다. 이어 88올림픽 이후 1990~2000년대까지는 나이트클럽 문화가 성행, 전국적으로 수천 개에 이르는 나이트클럽과 만명이 넘는 DJ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당시 이태원에만 술을 마시며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은 120여개. 서울 시내에서 클럽이 가장 많은 곳이 이태원이었다.

강남과 이태원이 최고의 놀이문화 근거지였으며, 영등포와 신촌, 대학가에도 나이트클럽이 많았고 그것이 젊은이들의 밤문화를 주도했다.

강남과 이태원이 놀이문화의 공간으로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 홍대는 적막하리만큼 조용했다.

1990년대 홍대의 놀이문화를 주도하는 형태는 락카페와 부르스하우스(부르스 음악을 전문적으로 들려주는 바 형태의 술집)가 전부였다. 조용한 홍대가 음악의 공간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던 시발점은 ‘씨티빗’이라는 한 레코드가게가 생기면서부터다.


국내 음악창고 ‘씨티빗’

당시 DJ로 활약하던 엉클(unkle, 예명)은 92년 홍대에 ‘씨티빗’이라는 레코드 가게를 오픈했다. 그리고 93년 홍대에 ‘발전소’라는 술집이 들어섰다. ‘발전소’는 홍대에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는 최초의 클럽이다. 술을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때로는 춤을 주기도 하는 형태의 업소로 댄스 음악만을 들려주는 락카페와는 본질이 달랐다.

‘발전소’는 모던락과 전자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며 홍대를 음악의 메카로 성장시켰고, 이 배경에는 ‘씨티빗’이 있었다. ‘발전소’ 클럽에 음악을 제공했던 곳이 바로 ‘씨티빗’이기 때문. ‘씨티빗’의 운영자 엉클이 추천하고 제공했던 다양한 음악이 ‘발전소’를 타고 홍대에 울려퍼짐으로서 ‘발전소’는 국내 유일의 새로운 음악을 전파시키는 매개체가 되고 소위 대박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씨티빗’은 ‘발전소’뿐만 아니라 많은 락카페의 주인들, 방송국의 음악담당자들, 댄스 음악의 작곡가 등 많은 음악인들에게 음악을 추천하고 제공하며 국내의 명실상부한 음악창고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홍대 최초 클럽 ‘MI’ 오픈

이렇게 ‘씨티빗’을 운영하며 음악만 제공했던 엉클은 어느날‘발전소’를 직접 방문한 후 고민에 빠진다. 자신이 제공했던 좋은 음악에 비해 사운드 시스템과 DJ 역량 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시스템으로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던 엉클은 95년 MI라는 클럽을 오픈한다.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과 새로운 인테리어로 클럽을 정비한 후 엉클은 마음껏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당시 홍대는 음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3개의 락카페, 블루스하우스, ‘발전소’가 전부였던 배경과, 심야영업 규제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엉클은 이같은 어려움들로 중간에 가게를 내놓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약 당일날 계약자는 어찌된 일인지 연락이 두절되며 나타나지 않았고 조금 더 참아보라는 계시로 알았던 엉클은 개척이나 마찬가지였던 MI의 운영을 계속했다.

그리고 1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결국 MI는 홍대 최초의 클럽, 최초의 전자음악 전파 창구의 역할을 명실상부 해낼 수 있었다.

1년간의 MI운영 과정에서 엉클은 돈보다 음악을 틀어주기에 목적을 가졌던 터라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가게를 내놓으려 했던 이유도 당시 정부의 심야영업규제와 클럽 허가에 대한 법망이 애매해 경찰을 자주 만나게 될까 두려워 했던 아내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때 당시 계약자가 약속대로 나타나 클럽을 매매했더라면 지금의 홍대도, 엉클도 없었을 것이다.

테크노 음악이 주를 이뤘던 MI의 운영 초기에는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음악이 많이 들려졌던 탓에 유학파들이 많았다. 그리고 프리랜서 등 자유롭게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직업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물론 음악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소문난 댄서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모델들도 모였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웬만한 연예인들은 다 볼 수 있는 곳이 MI였다. 초라해 보이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지금 홍대 클럽문화의 주축이 된 공간인 셈이다.


2001년 3월, 클럽데이 탄생

엉클이 운영하던 클럽 MI가 이렇게 성공하자 ‘올 카인드(ALL KIND)’라는 클럽이 생겼다. 이름 그대로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전파하는 클럽이었다. 클럽의 수가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업주들은 테크노, 댄스 등 각자의 음악적 색깔을 고집했고, 점차 음악클럽 밀집지로서의 홍대 모습이 형성되어 갔다.

그리고 2001년 3월 최초의 클럽데이가 탄생했다. 지금의 클럽데이는 13개의 홍대 클럽들이 하나가 되는 날. 티켓 한 장으로 모든 클럽을 즐길 수 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최고의 축제이다. 사실 클럽데이의 시초는 MI를 비롯한 6개의 테크노 클럽 중 2개를 제외한 4개의 테크노 클럽이 모여서 벌인 테크노 파티라고 한다.

4개 클럽 연합의 테크노 파티가 끝난 후 주변 클럽들의 “같이 해보자”는 요청, 클럽데이를 다양화시키자는 의지 등이 결합되면서 테크노 외 다른 클럽도 참가를 허용했고 7~8개에서 유명클럽 nb까지 가세하며 지금의 13개까지 클럽데이 참여는 확장됐다.

이렇게 단순한 파티에서 시작된 클럽데이는 날짜와 형태에 대한 구상이 구체화 되면서 지금처럼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로 정식 지정됐다.


번화한만큼 부작용도

이렇게 DJ 엉클이 홍대에서 머문 자취들은 곧 홍대의 발전상이나 다름없다.

“내 얘기가 결국 홍대의 이야기”라고 엉클은 전언한다.

한때 국내 음악 창고 역할을 담당했던 엉클의 레코드가게 ‘씨티빗’은 음반시장의 불황으로 3년 전 부득이하게 문을 닫고 말았다. 많은 음악인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DJ인생 25년을 보내고 있는 엉클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음악을 전파했고 지금도 음악작업을 하고 있는 평생 음악인이다.

한편 홍대에 강력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범죄의 온상이라는 일각의 우려가 높아진 현상에 대해 엉클은 장소에 대한 편견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호텔에서 마약을 했다고 해서 호텔을 욕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많아지다보니 밀집지역이 되고 사건도 많이 일어난다. 술에 취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고, 얼마 전 납치 살인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클럽에서는 클럽데이 때가 아니라도 가드(경호원)들을 여럿 두고 수시로 순찰을 돌고 있다.”

그러나 엉클 역시 지금의 홍대 모습이 달갑지만은 않다. 사람들이 너무 모이다보니 홍대는 늘 폭발 직전이며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도 많이 눈에 띄게 됨을 본인 역시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 흐르던 자유공간 홍대가 이제 복잡하고 위험한 유흥가로 변해버리지는 않을까 우려도 많다. 엉클의 마지막 멘트다.

“어떤 사건이 있어도 홍대 전체가 욕을 먹는다. 홍대의 발전이 어느 정도까지는 좋았다. 홍대가 번화하고 음악의 메카가 된 것 까지는…. 그러나 지금은 너무 포화상태이고 부작용도 많이 생겼다. 보기 싫은 모습도 많이 발생한다. 안타깝고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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