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번째 엄마’의 김혜수

데뷔 20년 만에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김혜수. <타짜>의 팜므파탈 정마담에서 <좋지 아니한가>의 엽기적인 무협소설 작가에 이르기까지. 매번 전혀 다른 캐릭터를 맡아 폭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인 그녀가 이번엔 ‘엄마’로 변신했다. 개봉을 앞둔 영화 <열한번째 엄마>를 통해서다. 피 한방울 안 섞인 여자와 소년이 인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김혜수의 눈빛은 한결 깊고 따스하다.



영화 <타짜>를 촬영 중이던 김혜수는 우연히 <열한번째 엄마> 시나리오를 읽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책장을 넘겼던 김혜수는 가슴이 너무 아파 밤새 눈물을 쏟았고 결국 제작사에 먼저 출연 제의를 했다.

“배우로서 욕심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택한 지는 얼마 안 됐다. 여느 배우들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시나리오, 역할 등이 작품 선택 기준인데 이번엔 좀 달랐다. 우리 주변의 소외받고 불행한 사람들, 그런 상황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고 관객들도 영화를 보고 그 분들을 떠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혜수의 마음을 움직인 <열한번째 엄마>는 세상에서 버려지고 기댈 곳 없는 33살 여자와 11살 소년의 이야기다. 이미 열명의 엄마가 거쳐 간 소년 재수(김영찬)에게 온 ‘이상한’ 열한번째 엄마(김혜수). 매번 잔소리하는 재수와 “우리 무시하고 살자”며 윽박지르던 여자는 서로 비슷한 상처가 있음을 알게 되고 조금씩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간다.

영화 속에서 희망도 가질 수 없을 만큼 각박한 삶을 사는 여자로 분한 김혜수의 이미지는 파격적이다. 헝클어진 커트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줄담배를 피며 아이에게 욕설을 내뱉는 모습은 지금까지 김혜수가 보여주지 않은 또 하나의 얼굴인 듯하다.

<타짜>의 정마담처럼 섹시한 역할에 비해 다소 망가진 느낌도 들지만 이 명민한 여배우는 보여지는 모습보다 연기 자체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을 줄 안다. “정마담 같은 역을 하면서 멋진 옷을 입고 좋아할 때도 있지만 <좋지 아니한가>나 <열한번째 엄마> 같은 경우엔 전혀 꾸밀 필요가 없어서 또 좋다. 매 작품마다 다른 연출을 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다”는 말 속에서 20년간 쌓은 연기 내공이 느껴진다.

<열한번째 엄마>를 촬영하는 동안 김혜수의 최대 관심사는 아역배우 김영찬과의 교류였다. <분홍신>에서 엄마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경험이 있지만 이번엔 엄마라는 캐릭터보다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재수와 여자의 관계에 더 집중했다. 때문에 김영찬과의 친분 형성이 가장 중요했는데 한곳에서 오래 촬영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모자(母子) 감정이 생겼다고.

“여자에겐 태생적으로 모성이 있는데다 엄마가 될 나이라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영찬이에게 ‘우리 애기, 엄마한테 와’라는 말을 많이 했다. 영찬이 어머니껜 죄송한데 한 곳에서 오랜 시간 같이 촬영하다 보니 진짜 내 아이 같은 느낌이 강하게 생기더라.
(웃음) 영찬이를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담배피우고 욕하는 초반 장면 촬영 땐 일부러 얼굴을 안보고 연기했다.”

김혜수는 김영찬의 순수한 연기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감정을 계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황과 인물에 몰입해서 ‘진짜’를 보여주는 김영찬을 통해 자꾸 무엇인가를 보태려는 기교 섞인 연기를 견제할 수 있었다.

“영찬이가 맞는 장면 촬영이 다가오면 악몽을 꾸고 리허설 때는 펑펑 울었다. 그러다가도 촬영할 때 이 악물고 연기하는 거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워낙 예쁘고 맑은 아이라 촬영 내내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역배우 얘기를 할 때마가 얼굴에서 잔잔한 미소와 애정이 가시질 않던 김혜수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속내도 털어놨다.

“문득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분홍신> 때도 그랬는데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는 더 그랬다. 물론 생각만으로 엄마가 될 수는 없지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많이 한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더해진 나이와 쌓인 경험은 김혜수에게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성숙한 생각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엄마한테 잘한다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신다. 엄마는 언제나 내 마음이 돌아갈 수 있는 존재인 것 같다”는 김혜수의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영화가 개봉하는 순간까지 <열한번째 엄마>에 출연하게 된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김혜수는 ‘자신이 왜 배우가 됐는지’도 잊지 않으며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준비를 끝낸 듯하다. 참고로 내년 상반기엔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에서 당대 최고의 모던 걸 ‘조난실’로 분해 특유의 관능미를 발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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