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해야 할 일 했을 뿐”

'서교동 초인종 의인' 故 안치범(28)씨 (YTN 뉴스 캡쳐)

각박한 세상 속 빛나는 의인들의 ‘살신성인’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하루에 수없이 쏟아지는 뉴스는 대부분 어두운 소식들이다. 살인·성폭행 등 각종 사건·사고, 대화·타협은 찾아보기 힘든 정치,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비리 등 이를 보고 있자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 마음에 ‘빛’을 밝혀주는 소식들이 있다. 바로 자신보다 남을 위해 선행(善行)하는 ‘의인’들에 관한 것이다. 최근 ‘신월동 괴력 의인’, ‘쌍문동 화재 의인’, ‘서교동 초인종 의인’ 등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뉴스들이 잇따라 전해져 화제가 되고 있다. 일요서울은 우리 사회의 ‘작은 영웅’들을 조명해봤다.

최근 가장 ‘따끈따끈’한 인물은 ‘신월동 괴력 의인’ 박대호(32)씨다. 박 씨는 지난달 23일 자신이 사는 양천구 신월동 다가구주택에서 발생한 화재에서 남매 2명을 구출했다. 당시 집에 있던 박 씨는 플라스틱이 타는 냄새를 맡고 대피하다 이미 복도에 연기가 차는 걸 목격했다. 이후 초인종을 누르며 거주자들에게 화재 사실을 알리고 다시 대피하던 중 갑자기 지하층 창문이 열렸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저 여기 갇혔어요.” 한 여학생의 외침을 듣고 지하층 현관문으로 갔지만 이미 불길이 심해 정상적인 방법으론 들어갈 수 없었다. 당황도 잠시 박 씨는 여학생이 소리쳤던 건물 외벽 방범창으로 돌아갔다. 방법이 없었다. 그는 힘을 발휘해 방범창을 뜯어냈고, 여학생과 다른 방에 있던 오빠를 구출했다.

박 씨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맨손으로 방범창을 제거하고 학생들을 구조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로서 학생들이 갇혀 있는 것을 보고 괴력이 발휘된 것 같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양천소방서는 박 씨에게 서장 표창을 전달할 계획이다.

근 일주일 새 세상에 알려진 다른 화재 의인들도 빠질 수 없다. ‘쌍문동 화재 의인’과 ‘서교동 초인종 의인’이다. 지난 24일 새벽 4시 30분쯤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 아파트 13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12층에 살던 김경태 씨는 1층으로 긴급히 대피하면서 모든 현관문을 발로 차고 손으로 두드려 이웃들에게 알렸고,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임 모씨는 휴무임에도 급하게 나와 가스밸브를 잠그며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안타깝게도 13층에 살던 일가족 중 가장 이모씨(46)와 10대인 두 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 덕분에 더 큰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김경태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한 일은 뭐 하나도 없다”며 “누구를 막론하고 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임모씨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라며 인터뷰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지난 주중에는 초인종 의인 故 안치범(28)씨의 안타까운 소식이 세상에 전해졌다. 지난 9일 새벽 4시쯤 한 20대 남성이 여자친구의 이별통보에 격분해 안 씨가 거주하던 원룸빌딩에 불을 질렀다. 가장 먼저 탈출한 안 씨는 119에 신고한 뒤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초인종을 누르고 크게 소리치면서 이웃들을 깨웠다.

이 같은 안 씨의 노력으로 주민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으나 정작 자신은 화마 속에 쓰러져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직장인 김모(33)씨는 “뉴스를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가슴이 짠하고 먹먹하다. 좋은 곳으로 가시길 빌겠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는 안 씨를 의사자로 지정하기 위해 검토 중이다.

선로의 의인들

최근 경북 김천의 ‘선로의 의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작은 영웅이다. 사건은 지난 12일 김천시 모암동 KTX 상행선 선로에서 일어났다. 당시 이곳에는 11명의 작업자가 있었다. 3명은 손수레를 끌고 있었고, 나머지는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작업자 중 한 명이 열차가 다가온다고 소리쳤다.

이들은 철로가 곡선이어서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 KTX 열차는 시속 170km로 달려오고 있었다. 혼비백산이 된 이들은 얼른 손수레를 치우려고 달려들었다. 선로에 돌멩이 하나만 떨어져 있어도 열차가 탈선할 수 있기 때문에 손수레는 큰 위험물이었던 것이다.

작업자 중 일부는 미리 피해서 화를 면했다. 하지만 작업자 장모(51)씨와 송모(46)씨는 끝까지 손수레를 밀어내려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열차에 치여 변을 당했다.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건 이후 상황은 안개 속이다. 사고 발생 경위를 두고 코레일 측과 작업자들 간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코레일은 이들이 지시 없이 선로에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반면 작업자들은 지시를 받고 들어갔다고 맞서고 있다. 작업자들은 하청업체 직원으로 알려졌다. 코레일 홍보팀 관계자는 “현재 이 문제에 대해 경찰에서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대형 참사 속 빛난 의인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던 대형 참사에서도 의인들은 존재했다. 2014년 2월 경북 경주시 마우나 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로 희생된 고(故) 양성호 학생 얘기다. 당시 이 사고로 10명의 사망자를 포함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던 부산외대 미얀마어과 학회장 양 씨는 체육관 지붕이 무너지자마자 창문을 깨고 후배들과 탈출했다. 하지만 후배 중 일부가 보이지 않자 사고현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나 양 씨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건물이 추가로 붕괴되면서 철 구조물에 깔려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런 양 씨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양 씨를 의사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그 해 3월 의사자로 지정됐다.

실종자 포함 304명의 목숨이 수장됐던 세월호 사건 속 의인들도 빠질 수 없다. 고 박지영 승무원(22·여)은 물이 가슴까지 차오를 때까지 승객의 대피를 도와 50여 명의 목숨을 구했지만 자신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세월호 아르바이트생 고 김기웅(28)씨와 사무직 승무원 고 정현선(28·여)씨도 학생의 구조를 돕고 배 안에 남아 있는 승객을 구하러 들어갔다가 숨졌다. 고 최혜정 단원고 교사(25·여)도 학생을 살리기 위해 침몰하는 배 아래로 내려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특히 김 씨와 정 씨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여서 주위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파란 바지의 의인’으로 불리는 화물차 운전기사 김동수(51)씨는 자신의 몸에 소방호스를 감아 20여 명의 학생들을 구했고, 고 김관홍 잠수사(43)를 비롯해 몸을 아끼지 않고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잠수사 의인’들도 있었다.

이 외에도 지난해 9월 교통사고 중상자를 응급 처치하던 중 다른 차량에 치여 숨진 고 정연승(35) 육군 특전대원, 2001년 일본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열차에 치여 세상을 떠난 고 이수현(26) 씨 등 수많은 의인들이 있다. 이들의 따뜻한 선행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각박한 세상에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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