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고문들의 활약


영화와 드라마의 생명은 ‘사실성’이다. 등장인물과 이야기 모두 진짜처럼 보여야 관객들을 사로잡고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작품과 관련된 각 분야 전문가를 ‘고문’으로 초빙, 조언을 듣는다. 때론 기술(?)도 전수 받는다. ‘타짜’에서 의사에 이르기까지 전문가 범위도 넓다. 영화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재미까지 좌지우지하는 고문들의 활약상을 살펴본다.


‘소매치기 전문 형사’가 스텝?

최근 서울 남대문경찰서 강력 3반 오연수 반장 이름이 연예기사에 등장했다. 1월 10일 개봉하는 영화 <무방비도시> 때문이다. 김명민, 손예진 주연의 <무방비도시>는 강력사건을 전담하는 ‘광역수사대’와 ‘기업형 소매치기 조직’의 대결을 그린 작품. 오 반장은 제작기간 내내 ‘소매치기 자문’으로 불리며 제작진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20년 간 소매치기 전담 형사로 근무, 소매치기 검거로 국내 최초 ‘전문수사관’ 인증을 받은 오 반장은 시나리오 초기 단계부터 참여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광역수사대의 활약상, 소매치기 조직의 세계 등을 공개해 영화의 리얼리티를 책임졌다.

이뿐 아니다. 광역수사대 형사역의 김명민이 실제 광역수사대원들과 생활하고 소매치기 역의 손예진, 김해숙이 전직 소매치기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다리도 놔줬다.

틈틈이 촬영현장을 찾아 배우들의 세세한 행동과 손놀림을 지도해주는 열정까지 보였다. 이런 공을 인정받았는지 <무방비도시>에는 오 반장을 모델로 삼고 이름까지 딴 ‘오연수 반장’(손병호)이 등장한다.

<무방비도시>만이 아니다. 최근 작품의 사실성이 더욱 중시되면서 여러 영화가 관련분야 전문가들 도움을 받고 있다.

고문으로 초빙된 전문가 조언은 작품의 리얼리티와 재미는 물론 배우들 연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전문가 ‘고문’으로 활약

허영만 화백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전문도박꾼의 삶을 그린 <타짜>.

이 영화엔 전설적인 타짜였던 장병윤씨가 ‘기술고문’으로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장씨는 도박의 ‘도’자도 모르는 주연배우 조승우, 유해진, 백윤식에게 각종 도박기술을 전수했다.

덕분에 배우들은 대부분의 도박장면을 대역 없이 촬영할 수 있었다. 도박장 모습, 도박세계의 원리 등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아 영화의 사실성을 극대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해 예상 밖의 흥행을 거둔 <식객>엔 ‘음식감독’이 있었다. 최고 요리사 자리를 두고 성찬(김강우)과 봉주(임원희)가 펼치는 숙명의 대결을 그린 이 영화에서 요리는 제2의 주인공이라 할 만큼 중요했다.

이에 제작진은 ‘푸드&컬처코리아’ 원장이자 요리연구가인 김수진씨를 음식감독으로 초빙, 제작단계부터 함께 했다.

김 원장은 김강우와 임원희에게 칼질부터 각종 조리법까지 요리의 모든 걸 가르쳤고 영화에 나오는 100여 가지 음식을 만들고 감수했다.

제작회의에도 참여해 요리는 물론 음식세팅, 재료구매 등에 관한 의견을 내놓으며 제작진 못잖은 열정을 불살랐다. 덕분에 <식객>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서민적 음식에서 궁중음식까지,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음식들이 오감을 자극하고 영화의 재미까지 높인다”는 평을 받았다.

1970년대 정부에서 시행한 가족계획 이면을 코믹하게 그린 <잘 살아보세>는 실제로 보건부 ‘가족계획요원’으로 활동한 이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모티브를 제공한 건 물론, 촬영장까지 방문한 전직 가족계획요원들은 현장을 뛴 경험담을 들려줬다. 이는 극중 가족계획 요원으로 분한 김정은을 통해 되살아났다.


의사들이 도운 의학드라마

영화만이 아니다. 전문직 주인공이 급부상하면서 드라마도 전문가를 고문으로 두고 촬영에 임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안방극장에 ‘하얀 가운 열풍’을 일으킨 <외과의사 봉달희>와 <하얀 거탑>이다.

흉부외과의사들의 희로애락을 그린 <외과의사 봉달희>는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김경환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고 드라마주인공 안중근(이범수)은 김 교수를 모델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촬영장에 전공의와 간호사가 늘 대기해 스텝과 배우들이 필요할 때마다 자문을 구할 수 있었다. 두 명의 보조작가 중 한명이 의사출신이라 의사들의 삶과 고뇌가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졌다는 평도 받았다.

<하얀 거탑>은 순천향대병원 간이식전문 외과의사 주종우 교수를 자문교수로 삼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대본작업부터 참여한 주 교수는 배우들에게 의학기술을 가르치는 건 물론 이식용 장기 등 소품에까지 신경을 써 제작진의 찬사를 받았다.

주인공 장준혁(김명민)을 비롯한 의사들의 수술 클로즈업장면에서 손 대역도 했다.

방영 되고 있는 <뉴 하트> 역시 서울삼성병원 이영탁 교수에게 자문을 구하고 의학기술도 배우고 있다. 이 교수는 극중 조재현이 연기하는 전문의사 ‘최강국’의 모델이기도 하다.

<올인>의 경우 <타짜>보다 먼저 장병원씨를 기술고문과 주인공 이병헌의 손 대역으로 섭외해 실제상황을 방불케 하는 도박 장면을 선보이는데 성공했다.


섭외위해 ‘삼고초려’ 노력

이처럼 각 분야 전문가들의 영화, 드라마 참여가 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섭외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일반인들에겐 영화나 드라마작업이 낯설고 제작기간 등 여러모로 부담이 적지 않다. 때문에 오랜 시간 참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납득시켜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삼고초려’도 각오해야 한다는 얘기다.

<무방비도시>제작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해 ‘이색 스텝’으로까지 불린 오 반장도 단번에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출을 맡은 이상기 감독과 7시간에 걸친 대화 끝에 협력을 약속한 것. 이후 2년 동안 어떤 스텝들보다도 열심히 뛰었다.

영화 관계자들은 “전문가를 데려오기 위한 삼고초려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해당분야 전문가가 적극 참여할 경우 작품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바닥에 몸담고 있거나 몸담았던 사람들 경험을 따라갈 순 없다는 것.

한 제작사 관계자는 “<타짜> <식객> 등 전문가 고문이 적극 참여한 작품들이 완성도는 물론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도 좋았지만 리얼리티도 한몫했다고 본다”면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사례는 더욱 늘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높아진 관객들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리얼리티에 중점을 두는 영화와 드라마가 늘어나는 요즘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고문으로 맹활약하며 작품의 완성도와 재미를 뒷받침해줄 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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