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 최악의 비극 영화”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드려 주세요.”

단편영화 ‘격정 소나타’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고 최고은(32)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영화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달 29일, 자신의 월세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 최 작가는 그동안 지병과 생활고로 인해 수일째 굶은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숨져있던 최 작가를 발견한 이웃주민은 “문 앞에 쓰여 있는 쪽지를 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그녀가 냉방에서 쓸쓸히 숨져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전해 애잔함을 더했다. 최 작가의 시신은 가족의 요청의 따라 지난 1일 화장, 한 줌의 재가 되어 납골당에 안치됐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영화계의 잔인한 현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고 최고은 작가에 대한 추모물결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사회, 문화, 정치권 인사들까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연일 최 작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배우 문성근은 자신의 트위터에 “최고은 작가의 죽음, 첫 보도가 나오기 전에 이창동 감독한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라며 비통한 심경을 전했다.

소설가 공지영 작가도 자신의 트위터에 “최고은 씨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이 사회의 안전망 없음에 다시 한 번 절망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아…”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네티즌들도 일제히 “요즘 같은 세상에 굶어서 죽다니 너무 안타깝다” “대책이 필요하지 않나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며 추모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국회도 깊은 애도를 표하고 나섰다.

MBC 사장 출신인 민주당 최문순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선진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에서 젊고 전도 유망한 예술인이 입에도 담기 힘들지만 굶어서, 생활고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민주당 차영 대변인도 국회에서 브리핑을 갖고 “슬프고 가슴 아픈 소식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최 작가의 명복을 빌었다.


영화노조 “명백한 타살”

애도 물결을 넘어 이 일을 계기로 영화계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이 시급하다는 움직임마저 활발히 일고 있다. 기존 낡은 제도를 반성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문화계 인사들의 의견이 잇달아 제기되면서 방안 마련에 대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제2, 제3의 최고은 사태가 언제 또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놓여있다. 2005년 영화산업노조가 출범하면서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이 꾸준히 진행 중이지만 시나리오 작가는 4대 보험 보장이나 최저 임금마저 받기 힘들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최 작가가 생전에 자주 썼던 ‘5타수 무안타’(5편의 시나리오를 썼지만 영화화된 작품은 하나도 없다는 뜻)라는 자조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영화 스태프들의 현실은 열악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영화산업노조가 실시한 근로 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화 스태프(팀장 미만)의 연평균 소득은 2009년 623만 원. 월 52만 원꼴로 최저생계비(2009년 1인 가구 기준 49만 845원)와 비슷한 실정이다.

이에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지난 9일 성명을 통해 “영화 스태프의 특성상 실업기간이 반복된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실업 부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정부에 계속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전하며 최 작가의 죽음에 대해 “명백한 타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씨와 최씨의 죽음에서 보듯 대중문화산업은 창작자를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 자본의 배만 불리고 있다”며 처우 개선을 촉구했다.

신인 시나리오 작가들이 영화 한편 당 받는 개런티는 보통 1500~2000만 원으로, 이들은 총 개런티 중 일부인 300~500만 원을 받고 시나리오를 넘기는데 제작이 무산되는 경우가 많아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 제작이 되더라도 나머지 잔금은 다 마무리 돼야 받을 수 있다. 또 시나리오를 넘기는 것 자체가 저작권을 넘기는 것이기에 저작권 수입도 없다.

한 시나리오 작가도 “TV드라마 작가는 재방료까지 받지만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2차 판권 수입은 전혀 없다”며 “좋은 시나리오가 없다지만 이런 상황에서 좋은 작가들이 TV로 가지 누가 영화계에 남아있겠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문화 안전망 구축… 충무로 변화시킬까

파장이 커지자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영화 제작자 환경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개선 의지를 밝히고 나섰다.

정 장관은 지난 10일 열린 ‘2011 콘텐츠 정책 대국민 업무보고’에서 “최 작가의 죽음은 있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라며 “그간 복지 입법안을 제출해 놓고 상임 위원장으로서 처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고, 조속히 처리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제시한 것이 문화 안정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이다. 콘텐츠 수요자뿐 아니라 제공하는 입장에서의 안정망도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전했다.

과연 고질적인 영화계의 산업구조가 관계당국과 영화계의 협조 아래 얼마나 현실적인 개혁을 이루어낼지 그 행보에 관심이 집중된다.

한편, 고 최고은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 2006년 ‘격정 소나타’로 제4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단편의 얼굴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또 지난해 여름에는 영화 ‘마음이 2’ 예고편과 메이킹 필름 작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후 차기작 제작이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렸다.

[최수아 기자] xowl2000@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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