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합동통신 전직기자 유숙열씨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경험 회고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재우기, 볼펜심 찌르기 등 무차별 자행

 
‘고문기술자’란 악명을 항상 달고 다녔던 이근안(李根安·80) 전(前) 경감에게 과거 물고문을 당한 전직 여기자는 지난 2012년 1월 17일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당시 페미니스트 웹진 ‘이프’의 공동대표였던 유숙열(64)씨가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에게’라는 글을 이프 홈페이지에 올린 것.

이 글에서 유 씨는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던 1980년 7월 17일 지명수배로 쫓기고 있던 당시 한국기자협회 김태홍(16·17대 국회의원·2011년 작고) 회장에게 피신처를 소개해줬다는 이유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근안에게 물고문을 당했던 일을 회고했다.
 
유 씨는 “그들은 기를 죽이려는 듯 처음에는 험악한 말로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을 했다가, 정중하게 ‘기자(記者)’ 대접을 했다가 또다시 뒷덜미를 잡고 물이 담긴 욕조에 머리를 쑤셔박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한참 고문을 받다가 30, 40대의 건장한 남자들 여러 명이 몽둥이를 들고 모여 있는 방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이근안을 만났다.
 
그는 “누군가 내게 칠성판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고… 다시 누군가 돌아누우라고 했고 돌아누운 내 몸 위에 버클이 주르룩 채워지며 육중한 몸집의 남자가 올라탔다”며 그가 바로 ‘이근안’이었다고 밝혔다.
 
유 씨는 “물고문 한번 당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온몸이 물에 젖어 한여름인데도 사시나무 떨듯이 몸이 떨려왔고 담요를 여러 장 뒤집어써도 추위가 가시질 않았다”며 당시 당한 고문의 충격을 전했다. 이 씨에게 고문을 당한 유 씨는 고문의 쇼크로 침대에 누워 링거를 꽂게 됐는데 이때 그녀의 생리가 갑자기 터지는 난감한 일이 생겼다.
 
달리 방법이 없던 유 씨는 이 씨를 불러 “아저씨…저 생리가 터졌는데요”라고 말했고, 이 씨가 생리대와 팬티를 사다 주면서 ‘내가 생전 여자 속옷을 사봤어야지. 가게 가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냐’면서 호들갑스럽게 여자 팬티 사온 얘기를 동료 앞에서 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순진한 마음에 사람을 고문하는 직업을 가진 당신이 진심으로 안쓰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또 곤란한 일을 해결해준 당신에게 인간미를 느꼈는지 이 씨에게 “직업을 바꾸라”고 말했다고 했다.
 
유 씨는 “남들이 당신을 목사직에서 끌어내리기 전에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청소부가 되어서 묵묵하게 자신의 죄(罪)를 씻고 또 씻으십시오. 아니면 당신이 일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경비원으로 역사(歷史)의 산 증인이 되어 사죄하십시오”라며 글을 맺었다. 지난 2012년 1월 14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고 이근안 씨에 대해 목사직 면직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피해자들이 전하는 고문 행태
 
이 전 경감은 별명 그대로 갖가지 ‘금수(禽獸)’같은 고문 행위로 피해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지난 87년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에 사용된 것으로 악명높은 물고문은 물론 전기고문, 잠 안재우기 고문, 볼펜심 찌르기 고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몹쓸 고문을 무차별적으로 자행했기 때문이다. 이근안씨는 항상 그 선두에 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차별 구타는 고문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일상적인 조사 행위에 불과했다는 피해자들의 전언이다. 보통사람 허리 높이의 침대처럼 생긴 ‘칠성판’ 위에 사지를 묶어 뉘어놓고 얼굴에 수건을 덮어씌운 채 샤워기를 입과 코에 들이대고 물을 퍼붓는 동시에 새끼 발가락에는 전기선을 이어 전류를 흐르게 하는 고문, 손을 뒤로 묶고 욕조에 받아놓은 물에 머리를 처박아 실신할 때까지 물을 먹이는 물고문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실신한 고문피해자들이 모두 토악질을 해대면 이어 소금물을 먹인 뒤 또다시 고문을 시작했다고 한다. 굵직한 몽둥이로 어깻죽지를 마구 내려치고 몸이 부을 대로 부으면 두툼하게 오른 시뻘건 피멍 자리에 볼펜심 같은 날까로운 도구로 해당 부위를 콕콕 찌르는 고문도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 온 이들이 초기에 겪게 되는 대표적인 고문은 다름 아닌 잠 안재우기. 생년월일을 적어보라, 살아온 내력을 써보라는 주문에 뜬 눈으로 지새우는 1주일이 이근안에겐 짧은 시간이었을 수도 있지만 피해자들에겐 암흑에 묻힌 세월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문 장소로 주로 이용된 곳은 용공인사로 몰려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이근안에게 43일간 고문을 당하고 간첩혐의로 16년간 복역한 함주명 씨는 199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하면서 ‘조작된 조서’를 읽고 확인을 거듭 강요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더 이상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악몽에 치를 떨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누구?
 
이 전 경감은 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 88년 12월 24일 고문 혐의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도주, 잠적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대공 분야에만 몸담은 공안통. 88년 12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2011년 작고)를 고문한 혐의로 수배중이었던 이 전 경감은 그동안 ‘밀항설’ ‘변장설’ ‘사망설’ 등 온갖 추측만 무성했을 뿐 실제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따라 수사관들 사이에서는 과거 그가 간첩을 잡기 위해 1년간 엿장수로 변신했던 경력이 있었던 점에 미뤄 교묘히 변장하고 다닌다는 설과 가짜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성형수술과 체중 감량을 한 뒤 칩거하고 있다는 설이 회자되기도 했다.

그의 경찰 재직 시 활약상은 매우 탁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직 기간 매번 특진으로만 고속 승진했고 79년 경위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할 때는 ‘청룡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재직 기간에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이 중에는 ‘간첩검거 유공’이 4회나 포함돼 있고 81년에는 내무부장관 표창, 82년에는 ‘국가안보기여’로 9사단장 표창, 86년 경찰의 날에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대공·공안 분야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고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로부터 고문을 받은 피해자들은 그의 특징을 구릿빛 얼굴, 핏발 선 눈, 굵은 목, 딱 벌어진 어깨, 솥뚜껑처럼 큰 손 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현역 시절 90㎏이 넘는 거구로 조사실을 돌아다니면서 손가락 두 개로 팔을 슬쩍 잡아 누르면 기겁을 할 만큼 아팠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이 전 경감은 연행자 앞에서 한 손으로 사과를 으깨보이면서 “칠성판은 나의 발명품” “내가 손대면 입을 열게 돼 있다”는 등 위협적인 말을 예사로 하기도 했다고 한다. ‘반달곰’이란 별명을 갖고 있지만 80년에는 ‘박 중령’으로도 통한 그는 대전 H중, 서울 G고를 졸업했다. 이 전 경감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경찰공무원 인사기록카드에 취미는 독서, 특기는 합기도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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