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 라는 말은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순수 우리 말이다.그런 것이 예부터 일반에 회자되기를 ‘아치’는 아주 냉소적이거나 천한 신분을 일컫는 접속어가 돼버렸다. 왕조시대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렸던 백성들이 관속들을 싸잡아 벼슬아치로 불러 냉소했던 것이나 그 외 장사아치, 갓바아치, 점바아치 등이 그 시대 미천한 신분으로 불린 대표적 예일 것이다. 또한 남에게 동냥질하는, 즉 거지를 양아치(동냥아치)로 일컬어 경멸해온 바다. 특히 양아치를 말함에는 오늘에 이르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점잖은 자리에서까지 더욱 의미를 넓혀 쓰여지고 있다. 오히려 거지를 칭한 본래의 말뜻과 상관없이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 보거나 치사하다는 뜻으로 내뱉는 경향이 짙다.

어쨌거나 ‘○○아치’ 의 낱말이 주는 의미에는 예나 지금이나 남에게 빌붙어 피해를 입히고 괴롭히는 등 지저분한 무리를 야유하는 말뜻이 강한 것만은 틀림없다.우리는 이 땅의 역사를 말하면서 벼슬아치들의 수탈 행위와 위정자들의 탐욕 때문에 나라가 위기에 처했던 때의 숱한 흔적들이 너무 부끄럽다고들 한다.지저분한 역사가 쿠데타의 명분현대사를 기록하면서부터는 양아치로 불린 깡패 집단이 정치 전면에 등장했던 기막힌 정치깡패 시대를 빼 놓을 수가 없다. 그처럼 지저분한 역사는 결국 정치 군인들의 쿠데타 명분이 되었고 그 결과 민권이 숨죽인 암흑 시대가 수십 년 동안 또 역사를 더럽히는 가운데 야당정치는 이른바 제도권 정치와 재야 정치로 맥을 갈랐다. 재야 정치가 학생 운동권을 축으로 하여 부상한 결과는 드디어 김대중 정권의 출범을 이뤄냈다. 바야흐로 운동권 시대의 개막이었다.

운동권의 전면 배치는 당연히 개혁 그룹의 본격적인 정치 세력화로 이어졌다. 김대중씨가 단지 그들 세력을 믿고 당시 당내 역학구도로 봐서 족탈불급으로까지 여겨지던 노무현 카드를 꺼낸 것 자체가 이미 혁명의 시작이었고 참여정부 성사는 그 완결 편에 속 할 것이다. 전쟁에 이긴 쪽은 전리품을 얻고 나면 그만이지만 혁명에 성공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을 갖기 마련이다. 때문에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넘칠 만큼 대단했었다. 일부 기득권 층을 제외한 사회 전반이 신선한 변화를 갈망해서 조급해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1년이 지나는 동안 국민이 보고, 듣고 , 느끼고, 접한 나머지는 참담함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특히 막가파 ‘정치아치(?)’들이 저지른 가공스러운 비리 유형이 속속 드러날 때는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닫고서도 진동하는 구린 냄새가 워낙 역겨워 아예 코마저 막아 버렸으면 싶은 마음 들일 게다.신악이 구악을 뺨치는 현실신악이 구악을 뺨치고 있는 현실을 두고 폐수와 2급수에 비교하는 구차한 논리에 국민이 언제까지고 동의할 리도 없다. 국민이 기대하고 원하는 것이 혁명의 연장선에서 지배세력을 교체하여 반드시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됨을 보자는 게 아닐 것이다.혹이라도 음지에 웅크리고 있던 온갖 세균들이 양지로 기어 나와 제 세상 만났다고 번식을 시도하고 어둠 속에 시들어있던 독초가 태양 볕에 굳건해지기라도 할 무렵이면 약초는 고사하고 민초들 신세가 뻔하지 않은가. 벼락감투를 눌러 쓰고 권력의 단맛을 즐기겠다는 벼슬아치들과 그 그늘에 기생하려는 양아치들, 또 이들의 주구 노릇을 자임하는 정치아치들의 발호를 경계할 국민적 수단이 있다면 현재로선 그나마 참정권인 투표를 옳게 행사하는 길 일 것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