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 축소‧법관 독립 보장 등 사법부 개혁 나선다

<뉴시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한 추가조사위원회가 지난 22일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추가조사위는 이날 조사 보고서를 통해 법원행정처가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평소 다수 법관들에 대한 여러 동향과 여론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정황이 나타난 문건들이 상당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국정원 댓글 사건 항소심 선고 전후로 청와대와 교감한 정황이 새롭게 드러났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사법부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확인되자 판사 사회는 크게 술렁였다. 결국 김명수 대법원장은 추가조사를 결정했다.

법관 정치적 성향 분류해 내부 위원회서 특정 판사 배제
피해 판사 “보고서 누가 작성했고 어디까지 보고됐는지 밝혀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법원행정처가 사법부 내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에 ‘사법부 개혁’ 관련 학술대회 연기 및 축소 압박을 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당시 연구회 관련 부당 지시를 받았다는 판사가 ‘판사들 뒷조사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고 밝히면서 의혹이 커졌다.

이후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조사에 나섰고, 법원행정처의 일부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는 인정됐지만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실체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의혹은 가라앉지 않았고 전국 각 법원에서 판사회의가 잇따라 열리고 전국법관대표회의 등에서 추가조사 요구가 이어졌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를 거부하고 퇴임했다.

새로 취임한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관대표회의와 진상조사위 등 의견수렴을 거쳐 지난해 11월 추가조사를 결정했다. 추가조사위는 지난해 12월 말 문건이 들어 있다고 의심 받는 법원행정처 컴퓨터의 저장 매체를 복사해 조사를 진행했다.
 
판사 성향 분석은 기본
카페 폐쇄 유도 방안까지

 
추가조사위원회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판사들이 내부 게시판, SNS, 익명카페 등에 올린 글을 주목한 뒤 이에 관한 대응방안을 짰고 내부 위원회 선정 과정에서 정치적 성향을 분류해 특정 판사들을 배제하려 했다.

우선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2015년 2월 작성한 다음 카페 ‘이판사판 야단법석’ 현황보고에는 카페 개설 경위, 회원 현황 등과 함께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거나 직설적 표현 관련 부적절한 게시글이 있다고 적혀 있다. 이 카페는 익명이며 판사들만이 회원이다.

문제 소지가 있다는 게시글은 상고법원 설치, 원세훈 전 원장 항소심 선고, 특정 대법관 후보 임명 제청, 쌍용차 해고노동자 판결 선고, 법원 인사 시스템 등과 관련한 내용이다.

문건에는 해당 카페 존재 자체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며 언론 취재를 우려했고 선제적으로 신속히 대응할 필요성이 언급됐다.

구체적 대처 방안은 카페의 자발적 폐쇄를 유도하거나 법관윤리강령 위반으로 강제적 조치를 한다는 내용이다.

또 판사 언행 등에 관해 점검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각급 법원 주기적 점검 방안’도 나왔다. 법정 내 막말 여부와 함께 판사의 부적절하거나 비윤리적 내외부 행동을 제시했다.

광범위한 정보 수집을 위해 법원행정처 출신 등 ‘거점 법관’을 통한 동향을 주기적으로 파악하고 SNS과 게시판을 통한 비공식적 방법까지 동원하도록 적시됐다. 다만 ‘법관 사찰’, ‘재판 개입’ 등 반발이 예상돼 보안 유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특정 판사들이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과 외부 언론 기고 등 동향과 대응 방안 문건도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문건 작성은 2015~2016년 이뤄졌으며 주로 상고법원 반대, 대법관 임명 제청 등 사법제도 관련 글을 올렸을 경우 성향을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검토했다.
 
법원행정처-청와대와 소통
원세훈 재판 동향 보고까지

 
특정 사건과 관련한 재판부 동향 파악 정황도 드러났다. 2015년 2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 판결 선고 전후에 법원행정처가 BH와 연락해 의견을 나누고 정치권과 언론, 법원 내·외부 동향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검토한 내용이다.

문건에는 BH의 최대 관심 현안으로 ‘선고 전 항소기각을 기대하며 법무비서관실을 통해 법원행정처에 전망 문의’라고 돼 있고, 법원행정처는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우회적·간적접 방법으로 재판부 의중 파악 노력’이라고 적혀 있다.

선고 후에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사법부에 큰 불만을 표시하고 신속한 상고심으로 전원합의체 회부를 희망한다는 내용과 법원행정처가 상세한 입장을 설명했다고 서술돼 있다. 또 상고심에서는 기록 접수 전이라도 법률상 오류 여부를 면밀히 검토한다는 대응방향과 상고법원과 연관해 이니셔티브를 얻을 방안도 고려됐다.

사실 원 전 원장의 항소심 관련 청와대와 대응방안을 검토한 문서의 공개는 충격이 컸다. 사법부 독립 원칙과 가치를 법원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결국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 24일 “참담한 심정”이라며 대국민 사과했다. 그는 법원행정처 조직 개편, 법관 독립 보장을 위한 중립 기구 설치 검토 등도 약속했다.
 
새 법원행정처장 임명
‘재정비 시작’

 
추가조사위의 결과가 발표되자 판사들도 술렁이고 있다. 문유석 동부지법 부장판사는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성급히 뭔가를 앞질러 단정해서는 안되지만 이미 밝혀진 것들까지 모른 척하는 것은 더 이해할 수가 없다”며 “문건 자체보다도 우리 사회 일각의 태연자약함이 더 충격적”이라고 지적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컴퓨터 등 추가 조사하지 못한 부분을 규명하고 관련자 징계 및 검찰 고발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실제 문건에 이름이 오른 차성안 전주지법 군사지원 판사는 24일 법원 내부 게시판에 “부적절한 뒷조사를 누가, 어떻게 했는지, 어느 선까지 보고됐는지 사실관계를 확실히 밝혀낼 것을 희망한다”며 “비밀번호가 걸린 파일들과 임 전 차장의 컴퓨터 접근이 이뤄지기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뒷조사는 그 자체로 불이익”이라며 “원 전 원장 관련 보고서는 누가 작성했고 어디까지 보고됐고 대법원장·행정처장·대법관들에 대한 접촉 시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명확히 조사돼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한편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 25일 새 법원행정처장에 안철상 대법관을 임명했다. ‘인적 쇄신’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 대법관은 신임 처장으로서 추가조사 결과에 따른 후속조치를 맡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법조계 안팎에서는 김 대법원장이 내놓을 사법행정 개편과 법관 독립 보장 등 제도개선책이 오는 2월 정기인사를 기점으로 일부 수면 위에 드러날 것으로 관측한다.

법원행정처 축소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지난해 법원행정처의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 축소 압박 사태와 관련해 사법행정권 남용 문제가 심각하게 지적됐고 김 대법원장도 줄곧 법원행정처의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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