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日本 도쿄 한복판 팔레스호텔서 한국청년들에게 납치되면서 시작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이철희 정보차장보·하태준 해외공작국장 등 관여

 
지난 2006년 2월 5일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김대중(DJ) 납치사건의 발생 경위와 사건 후 한일 간 외교교섭이 비교적 자세하게 실려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사건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東京)의 한복판인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씨가 5명의 한국인 청년들에게 납치되면서 시작됐다고 1973년 11월 10일 작성된 ‘김대중 사건 관련 외교교섭’은 적고 있다. 현장 납치범의 수와 관련, “6명이었다”는 김대중 씨의 진술과는 다르다.
 
1972년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DJ는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1973년 7월 재미교포 반(反)체제 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여오던 터였다.
 
김대중 씨는 한민통 결성을 5일 앞둔 1973년 8월 8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梁一東)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호텔에 갔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대중 씨가 한국 정보기관원들에게 납치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김 씨는 피랍 5일 후인 13일 돌연 서울에 출현, 기자회견을 열어 “자칭 ‘구국동맹행동대원’들에게 피랍돼 서울로 연행돼 왔다”고 저간의 경위를 설명하기에 이른다.
 
외교문서 공개에 포함된 생환후 DJ가 당시 정명래 부장검사를 본부장으로 하는 피랍사건 특별수사본부에 밝힌 진술서에는 이보다 더 상세하게 피랍경위가 적혀 있다.
 
김 씨는 “팔레스호텔 2211호에서 양일동을 만나고 오후 1시께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7∼8보를 가는데 2210호에서 범인 3명이, 2215호에서 범인 3명이 출현해 그 가운데 2명이 배웅하던 김경인을 2211호로 밀어넣고 4명이 본인의 입을 막고 2210호로 연금했다”고 납치 순간을 기억했다.
 
그는 “범인들이 본인을 침대에 눕히고 눈과 입을 가리고 떠들면 죽인다고 하면서 마취를 시켰으나 정신이 몽롱할 정도일 뿐 완전히 마취되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어 그는 “범인들은 본인을 마치 환자처럼 양팔을 끼고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가는 데 17층 또는 18층에서 27세가량의 남녀 2명이 타므로 일본 말로 ‘살인자다. 살려달라’고 해도 반응이 없었고, 그 남녀는 7층에서 내려버리고 그런 후에 괴한 1명으로부터 구타를 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런 다음 지하 차고에서 승용차에 태워져 머리가 굽혀진 채 5∼6시간 고속도로를 질주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진(大津), 경도(京都)”라는 지명과 “안 씨 집으로 가자”는 말을 들었다는 게 김대중 씨의 기억이다.
 
그 후 어떤 집에 도착해 거기에서 가진 돈 20만 엔과 여권, 롤렉스 시계를 빼앗고 포장용 테이프로 코만 남긴 채 얼굴 전체를 싸고 손과 발을 결박한 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겨 다시 승용차에 태워져 이동해 같은 날 밤 11시께 어느 해안에서 모터 보트에 옮겨진 뒤 한 시간 후 다시 큰 배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김대중 씨는 배에서 수장의 위협을 느꼈다고 밝히고 있다.
 
“범인들이 얼굴에서 포장용 테이프를 떼고 눈에는 붕대를 감고 스카치 테이프를 3중으로 감았으며 입에는 나무로 재갈을 물린 채 손발을 결박한 후 오른쪽 손발에 각각 50㎏ 정도의 물체를 매달고 물속에 내던질 듯한 준비를 하다가 중지했다”고 그 순간을 기억했다.
 
그는 “53시간을 항해해 11일 오전 10시께 한국 해안에 도착해 다른 범인들에게 인계돼 대기하다가 오후 8시께 모터보트로 상륙해 눈을 가린 채 의사의 진료와 함께 주사 2대를 맞고 승용차로, 그리고 침대가 있는 차로 바꿔 태워져 갔다”면서 “(볼 수는 없었지만) 그 곳은 대형 화물차가 교차하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 점으로 미뤄 경남 울산 같았다”고 진술했다.
 
김대중 씨는 또 “11일 밤중에 어떤 집에 도착해 약 3정을 줘 받아먹고 잠이 들었으며 12일 오전 8시 깨보니 2층집이었고 그 집에서 손의 결박도 풀고 의사가 와서 진료했다”고 적었다.
 
그런 뒤 “13일 오후 8시께 서울로 출발하기 전 범인들이 ‘구국동맹 행동대원’이라고 신분을 밝혔고, ‘해외에서 국가를 비난하는 자는 처단하겠다’며 ‘집 근처에 도착하면 3분 안에 안대를 떼고 갈 것을 약속하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눈을 가린 채 두 시간가량을 승용차로 포장도로를 달려 그 날 오후 10시께 집 근처에 도착해 3분 후 안대를 떼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밝혔다. 정확히 피랍 129시간 만이다.
 
김대중 씨의 피랍 경위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문건이 1998년 국내 모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국가안전기획부의 극비문건인 ‘KT 공작요원 실태 조사보고’가 그 것으로 거기에는 DJ를 도쿄에서 서울까지 납치했던 경로와 납치에 가담했던 중정 요원 25명과 오사카 부두에서 부산까지 실어나른 용금호 선원 21명의 명단 및 그들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관여인사 일람표라는 제목으로 납치 사건의 최고 책임자는 이후락(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그 다음에 이철희(李哲熙) 정보차장보-하태준(河泰俊) 해외공작국장(8국)-윤진원(尹鎭遠) 8국 공작단장-김기완(金基完) 주일대사관 공사 등으로 ‘사건 지휘선’이 그려져 있다.
 
도쿄 팔레스호텔 납치작전은 윤 단장과 한 춘, 김병찬(일명 김동운) 홍성채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유영복·유충국 2등 서기관이 맡았다고 한다. 모두 6명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문서 하단에 ‘대통령 각하 보고필’이라고 적혀 있는 대목이다. 이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쳤다는 것으로 박 대통령의 관여 의혹을 짙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KT 공작은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따서 붙인 암호명이라고 한다.
 
피랍은 납치, 도쿄→오사카 안가, 오사카→오사카 부두, 오사카 부두→부산, 부산→ 서울 안가 이동 등으로 각 단계별로 9개조가 투입됐었다고 이 조사보고는 적고 있다.
 
조사보고에 따르면 1973년 8월 8일 오후 그랜드 팔레스호텔 2212호 스위트룸 앞 복도에서 김대중 씨를 6명이 납치해 일단 옆방인 2210호로 옮겼고, 거기에서 침대에 눕혀 마취제로 정신을 혼미하게 한 뒤 엘리베이터로 끌고 내려와 지하주차장에 대기시킨 차에 태워 현장을 벗어났다. 이 문서에는 현장인 팔레스 호텔을 빠져나간 시간이 오후 1시 19분으로 기재돼 있다.
 
외교문서에 담긴 일본 경찰의 사건수사 결과에 따르면 당일 호텔 지하주차장에서 나온 혐의 차량은 닛산 스카이라인의 차번호 시나가와 55모 2077이며 차적 조회 결과, 이 차량은 당시 요코하마 한국 영사관의 유영복 부영사의 차(車)라고 했다. 그런 후, DJ를 태운 닛산 스카이라인은 도쿄-오사카(大阪)간 고속도로를 5∼6시간 내달려 오사카 인근의 중정 안가에 도착했다.
 
이들은 DJ를 안가에서 오사카 부두로 옮겨 5백마력 엔진 2대를 장착한 대북공작선인 용금호에 실었다. 그후 용금호는 9일 오전 8시 45분 오사카를 떠나 11일 밤 부산에 도착한 뒤 밤새 대기하다가 12일 오전 7시 부두에 접안해 DJ를 내려놓았다.

부두에서 DJ는 다시 앰뷸런스에 실려 건강상태를 진단받은 뒤 안가로 옮겨져 하루를 묵은 뒤 13일 밤 서울 동교동 부근에서 풀려났다. KT 조사보고는 김대중씨를 진료한 사람이 김선배(金仙培) 중정 의무실장이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같은 내용을 정부가 이러한 내용에 대해 공식으로 확인한 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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