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사를 보면 흥한 재벌도 많지만 몰락한 재벌도 많다. 기업이라는 것이 항상 변화하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임을 전제로 한다면 재벌의 흥망성쇄도 모두 숙명적인 것이리라. 기자는 20년 가까이 재벌을 취재하면서 숱한 재벌과 재벌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오래전 그저 별 볼일 없는 중소기업에 불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몸집이 커져 재벌가의 반열에 오른 주인공도 있었고, 한창 잘 나가다 갑자기 몰락한 재벌도 많았다. 그렇게 흥망성쇄를 겪은 기업주들은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그러나 공통점은 대부분 비자발적이든, 자발적이든 사회적인 변화와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호부터는 필자가 경제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재벌가의 사람들이나 그들의 성공과 좌절을 기록해본다. 성공과 좌절을 겪은 기업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오늘에 살고 있는 신흥기업인들이 경영행보에 참고했으면 싶다.

대한선주가 한진그룹에 넘어간 과정

대한선주가 한진그룹으로 넘어간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윤석민씨는 1973년 해운공사를 인수한 뒤 회사 이름을 대한선주로 개명해 운영하다 80년대 들면서 불어닥친 해운산업 불황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결국 87년 정부의 ‘해운산업 합리화조치’에 따라 대한선주 경영에서 손을 뗐다. 당시 정부측 발표를 보면 대한선주는 해운사 부실기업의 대명사로 불렸으며,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은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대한선주의 부실여신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윤씨는 정부의 ‘해운합리화조치’에 대해 위헌이라고 맞서며 나중에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출하는 등 회사찾기 투쟁을 벌여 정부와 외환은행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윤씨측이 기자에게 소위 ‘읍소’하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기자가 그를 만날 즈음 윤씨측은 헌법재판소에 대한선주 문제를 헌법소원한 시기였다.

기자를 만난 윤씨측은 다소 엉뚱한 주장을 폈다.윤석민씨는 대한선주가 매각된 배경에는 ‘5공비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한선주의 경영권을 5공정부가 빼앗은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 제공요구를 거절한 것이 이유”라는 주장이었다. 당시 5공 정부가 막을 내린 뒤 언론을 중심으로 융단폭격식으로 터져나온 세칭 ‘5공비리 폭로’ 특수와 맞물려 윤씨측은 잃어버린 경영권을 되찾겠다는 뜻이 내심에 숨겨져 있었다. 그가 편 주장의 골자인즉, 정부가 대한선주의 부실이 한진그룹에 경영권을 인수시킨 이유라고 표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내막을 뜯어보면 한진그룹이 ‘수송전문기업을 표방’하고 정부에 대한선주를 넘겨받기 위해 로비를 벌여 상황이 악화됐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대한선주 매각문제는 정부가 주도하긴 했지만 이면에는 한진그룹이 ‘모종의 로비’를 벌여 일어난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제법 그럴듯한 ‘한진그룹의 비자료’까지 확보해 기자에게 넘겨주었다. 사실 이 부분은 윤씨측 주장에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윤씨측의 주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한진그룹의 로비에 의해 대한선주의 경영권이 넘어간 것이 아니라 대한선주가 부실화돼 도저히 기업경영이 지속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끝내 매각절차로 넘겨졌고, 이 과정에 한진그룹이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정부나 채권단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것이었다. 어쨌든 윤씨측이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한진그룹도 여간 긴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분위기가 5공비리에 의해 자행된 각종 민원들이 법원에서 원인무효 판결이 나오던 상황이라 자칫 대한선주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가 ‘이유 있다’고 판결할 경우 한진그룹으로선 ‘닭쫓던 개’꼴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한진그룹은 언론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전을 벌였다. 당시 한진그룹은 그룹의 대표회사격인 대한항공에만 홍보실이 있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그룹홍보실’이라는 조직을 따로 만들었다. 이 조직을 맡은 사람은 이사였던 한아무개씨와 김아무개 과장 등이었다. 한 이사는 사흘이 멀다하고 언론사 기자들을 접촉하면서 열성적이었다.

한진그룹 홍보실 만든 이유?

사족이지만, 한진그룹이 그룹홍보실이라는 조직을 만든 것이 순전히 대한선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진그룹은 이런저런 일로 골치가 아팠다. 가장 큰 부분은 아시아나항공이 출범하면서 홍보 대응이 필요했다. 신규노선에 대한 배정문제와 이원권(직항노선에서 타국으로 연결되는 노선)문제 등에서 우위권을 가지기 위한 여론조성이 절실했다. 여기에 그동안 꼭꼭 숨었던 제주도 제동목장의 부동산 문제도 불거져 그룹이미지가 여간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룹내부에서는 조중훈 회장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조 회장의 동생인 조중건 회장이 대한항공 경영을 맡은 이후 조양호-남호-수호-정호씨 등 조 회장의 2세들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진 점도 골치가 아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조중훈 회장은 그룹차원의 홍보실을 만들도록 했다.

얘기를 다시 대한선주로 돌려보면, 대한선주 사건은 결과적으로 윤석민씨의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씨측이 제기한 한진그룹과 외환은행을 상대로 낸 주식 및 경영권 양도계약 무효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이같이 판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채권단이 담보로 잡은 주식을 매각, 대한선주를 제3자에게 인수시킨 것은 부실기업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것”이라며 “당시 전 대통령이 윤씨 등에 대한 사적인 보복차원에서 경영권을 양도시켰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특히 재판부는 또 “정부가 통상적인 행정지도의 한계를 넘어선 채 부실기업 정리명목을 내세워 사기업 매각 또는 해체에 개입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며 “그러나 재무부 장관은 금융기관의 불건전 채권정리에 대한 행정지도를 할 권한과 책임이 있고 중요한 사항은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윤씨측은 헌법재판소에 정부의 ‘해운산업합리화조치’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헌법소원을 제기한지 7년이 지난 뒤인 1995년 무렵 헌법재판소는 ‘해운산업합리화 조치’에 대한 위헌문제는 이유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건은 사건이고, 이 기사를 취재하면서 기자는 윤석민이라는 인물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다. 그는 한마디로 ‘풍운아’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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