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했다. 서울대 총장에 출마하겠다고. 추석 연휴 전에 벌어진 일이다. 서울대 교수출신의 그 의원을 모시던 보좌진들은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신세가 되었다.

가족, 친지들 다 모이는 추석 연휴 전에. 국회의원은 사직을 해도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어야 확정된다. 153명이 투표하고 135명이 찬성해서 ‘사람 좋다던’ 오세정 의원은 ‘전 의원’ 신분이 되었다.


국회의원 배지는 황금색으로 휘황찬란하지만 개당 3만 5천 원에 불과하다. 은으로 제작해서 도금을 입힌다. 순금으로 제작한 때도 있었다지만 요즘 같은 시절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국회의원 배지에 가격이 매겨져 있다고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이 배지를 잃어버렸을 때 국회사무처의 확인을 거쳐 구매가 가능하다. 눈여겨보면 초선들은 어김없이 배지를 달고 다니지만 다선 의원들 가운데는 달지 않는 경우가 꽤 된다.

오 전 의원에게 국회의원 배지는 서울대 총장의 명예보다 귀한 자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유력 후보였다가 친박 인사에게 억울하게 총장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했던 오 전 의원에게는 선택의 문제였겠지만 다른 국회의원들에게 의원직 사퇴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일반적으로 비리나 불법을 저질러 재판을 받아도 대법원에서 확정될 때까지 의원직을 내려놓지 않는다. 항소하고 탄원하고, 부족하면 정치 탄압이라고 저항에 나서기도 한다.

우스개로 국회의원이라면 모두 청와대를 꿈꾼다고 한다. 6g에 불과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나면 신분이 달라진다. 대권을 꿈꾸는 게 어불성설인 국회의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쨌든 국회의원이 되면 중앙정치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국민의 대표로 국가의 정책을 감시하고 정부 예산안을 심의 확정하고 부여된 입법권에 따라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수 있는 권한도 생긴다. 선수가 올라갈수록 꿈은 더 커지고 배지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국회의원이 대단한 자리인 만큼 ‘전 의원’ 신분이 되면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을 겪는다. 낙선해서 ‘전 의원’이 되었다가 다시 ‘현 의원’이 된 한 여성 의원은 선거가 끝나고 한동안 집안에서 두문불출했다. 사람 만나는 게 두렵고, 사람이 미웠단다.

6개월을 집안에만 머물다 겨우 가족여행을 핑계로 바깥바람을 쐬고서야 심기일전해서 다시 지역 활동을 시작하고 끝내 국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면서 지금도 가끔 낙선의 설움을 읊어댄다.

선거에서 낙선하면 6개월을 시름시름 앓고 4년 동안 향수병에 시달리며 여의도를 그리워하게 된다고 한다. 대부분 국회의원은 식당 예약도, 기차표, 비행기표 예매도 자기 손으로 하지 않는다.

보좌진이 대신 해준다. 식사약속이 없어도 혼밥 먹을 일은 없다. 의원이 식사 약속이 없는 눈치면 약속을 잡아주거나 보좌진들이 당번을 돌면서 같이 밥을 먹어주기도 한다. 낙선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던 보좌진들이 사라지니 더 서럽고 외롭다.

그래서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한 몇몇은 지역구에 목숨을 건다. 입법이나 상임위, 예?결산 관련한 의정활동에는 별 관심이 없고 지역 민원만 챙긴다. 보좌진들도 지역사무실에 더 많이 두고, 자신도 틈만 나면 지역을 누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일부 초선의원들은 아예 첫 등원할 때부터 재선이 유일한 목표라고 공공연하게 밝히기도 했다. 배지가 준 권한을 잘 사용할 생각보다 배지를 지킬 욕심만 간절한 것 같아 씁쓸한 입맛을 감추기 어렵다.

국회의원 배지는 벼슬로  달아준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달아 준 임명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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