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28)
삼 불 망(三不忘) - (28)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8-11-05 14:39
  • 승인 2018.11.05 14:42
  • 호수 1279
  • 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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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제현이 지공거로 임명된 뒤 실시된 이 과거에서 이곡(李穀), 안보(安輔), 백문보(白文寶), 윤택(尹澤) 등의 성리학자들이 급제했다. 충렬왕~충정왕 시기에 과거 급제자의 평균 연령이 21.5세였다. 따라서 좌주인 이제현과 그의 문생들과는 나이 차이는 평균 13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점은 뒷날 이제현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장기간 유지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과거가 끝난 후 이제현은 아버지(이진)의 희수(喜壽)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진과 부인이 앉은 앞과 등받이에는 홍도화(紅桃花) 등 삼색 도화로 종이꽃을 꾸며 꽂고 차일대에도 꽃을 묶어 잔치 마당을 온통 꽃으로 에워쌌다. 연꽃잎을 쓰고 안개옷을 입은 악공이 생황(笙簧)을 부니 이에 맞춰 기생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돌았다. 두 사람은 대청마루 위에 앉아 큰아들 이관(李琯) 이하 자손들의 인사를 차례로 받았다. 이제현은 새 문생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뜰아래에서 절하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한국대부인 박 씨도 고희(古稀)로 장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진의 희수가 더욱 빛났다. 멀리 서역땅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충선왕이 은병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여 축하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부러워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충좌가 최해, 안축 등 친구들을 대표해서 이진이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수(長壽)의 마음가짐’이라는 시중의 우스갯소리를 전해서 좌중을 웃겼다.

“아버님, ‘희수(喜壽, 77세)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 노락(老樂)을 즐긴다 하여라. 산수(傘壽, 80세)에는 그래도 아직 쓸모 있다 하여라. 미수(米壽, 88세)에는 쌀밥을 조금 더 먹고 가겠노라 하여라. 백수(白壽, 99세)에는 때를 보아 서서히 가겠노라 하여라’는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아버님, 마음을 둥글게 하시고 화를 잘 다스리시면 백수를 누릴 수 있사오니, 부디 만수무강하시기 바라옵니다.”

그러자 이진이 가볍게 수염을 쓸며 말했다.

“치암, 자네가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많이 애쓰고 있구먼.”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응시하는
최해, 안축, 이연종을 축하하다

그해(1320년) 10월 말경. 이제현, 박충좌, 안축, 최해, 이연종(李衍宗)이 개경 남대가 시전거리 단골 술청에 모였다.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응시하는 재원으로 선발된 최해, 안축, 이연종을 축하하기 위해 이제현이 연 자리였다. 결발동문 4인방 이외에 이연종은 최해와 과거를 함께 등과한 동기로 인연이 있었다.

큰 트레머리를 하고 흰 가르마를 탄 젊은 주모는 잘록한 허리 살을 드러내고 맵자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젊은 선비들을 맞았다. 주모의 하얀 살결이 초겨울 저녁 달빛에 반사되어 옥처럼 빛났다.

이날 모임을 주선한 이제현이 취지를 설명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자네들을 한자리에 초대한 이유는 최해, 안축, 이연종이 모두 원나라 과거에 등과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서네. 오늘 저녁은 마음껏 마시고 취하도록 권해보세.”

작달막한 키에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최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 자리는 익재가 마련했지만, 술값은 당연히 근재(謹齋, 안축의 호)가 내어야 할 것일세 그려. 근재의 아우인 안보(安輔)가 지난달 과거에 등과하지 않았던가. 익재가 안보의 좌주가 되었으니 당연히 형님이 아우의 좌주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일이지.”

좌중이 모두 폭소를 자아냈다. 이연종이 너스레를 떨었다.

“졸옹(拙翁, 최해의 호)이나 근재의 학문은 원나라 과거에 등과하고도 남을 실력이나 나는 도무지 자신이 없으니 걱정이 태산 같소이다.”

얼떨결에 오늘 모임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안축이 분위기를 돋우었다.

“사헌규정(이연종의 관직)은 겸손한 말씀을 하시는데, 나나 졸옹은 오히려 사헌규정의 철석간장(鐵石肝腸, 굳센 지조)을 배워야 할 것 같소이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깡마른 박충좌가 한마디 거들었다.

“근재의 말이 백번 지당하다고 생각하네. 고려 선비들 중에 사헌규정만 한 기개를 가진 분이 흔치 않네. 세 사람은 모두 원나라 과거에 등과를 할 테니 과히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이제현이 박충좌의 말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말을 했다.

“치암은 점쟁이가 다 된 것 같네. 일찍이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은 ‘신라의 개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으리!’ 라고 했네. 친구들이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등과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고려 선비의 기개를 원나라 조정에 떨치는 일이라 생각하네.”

술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젊은 관원들은 모두 얼큰하게 취했다. 주모는 물찬 제비처럼 날씬한 몸매와 잘 익은 복숭아색 뺨, 반달 같은 눈썹과 교태로운 눈을 가진 어린 기생을 대령시키며 말했다.

“사헌규정 나리께서 늘 욕심내시던 연화(蓮花)랍니다. 그렇지만 나리께 그만한 복이 있을까 몰라.”

이연종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연화야, 너는 올해 몇 살이지?”

“이팔청춘 열여섯입니다.”

“한창 좋은 나이군.”

옆에 앉아 있는 주모가 연화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도 같은 여자이지만 연화는 참 재주가 많아요. 거문고며 비파며 못 다루는 악기가 없고, 그림도 잘 그리고 문장도 탁월하답니다.”

주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축이 연화를 치켜세웠다.

“연화야, 너의 위명(偉名)은 사헌규정으로부터 듣고 있었으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마치 선녀가 하강한 것처럼 화용월태(花容月態,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맵시)로구나. 너의 가야금 연주 솜씨를 한번 보여주겠느냐?”

이연종과 안축이 연화에게 수작을 벌이고 있는 동안, 이제현은 불현듯 연경의 만권당에 남겨 두고 온 정인 해월이가 그리워졌다.

‘해월이와 헤어져 만권당을 떠나온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해월이는 얼마나 변했을까. 더 예뻐졌겠지…….’

이제현의 눈가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이때 이제현의 수심을 알기나 하는지 연화는 관원들에게 한 무릎을 세우고 살포시 인사를 한 후 날아갈 듯 연연한 기생의 앉음새로 고쳐 앉아 가야금 연주를 시작했다. 이윽고 <쌍화점(雙花店)>이 구성지게 울려 퍼졌다.

쌍화점(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아랍상인)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잡더이다).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들며 하면(소문이 퍼지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난잡한 곳이 없다).

연화의 가야금 소리는 선녀가 내려와 타는 듯이 신비한 음률을 냈고 노랫소리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맑고 청아했다. 창밖을 두드리는 빗소리조차 숨을 죽인 듯이 연화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애절한 곡조에 젊은 관원들은 모두 넋을 놓고 있었다.

이윽고 이연종이 연화의 가야금 반주에 맞춰 <정읍사(井邑詞)>를 한 곡조 부르자, 최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사위를 보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이어 이제현은 원나라로 떠나가는 세사람을 전송하는 시를 지어 축하했다.

옥피리 서너 곡조 끝마치고

금잔으로 취하도록 권해보세

임금님 은총에 보답할 뿐

우리들 이별은 애석히 여길 것 없지

(하략)

고려의 간성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선비들의 저녁 모임은 자시가 넘어서야 파했다. 이듬해(1321년) 치른 제과에서 이들 중 최해만 합격하여 원나라의 관직인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盖州判官)에 임명된다.

충숙왕과 심양왕 왕고의 권력 투쟁

권력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인간의 모든 몸짓은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기에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못하는 법”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충선왕이 세력을 잃고 유배되자, 힘의 진공상태가 생겼다. 충선왕의 유배는 충숙왕에게는 기회였다. 고려 조정은 정치권력을 놓고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 주인공은 충숙왕과 심양왕 왕고(王暠, 충선왕의 조카)였다.

그동안 아버지 충선왕의 간섭을 받고 있었던 충숙왕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친정(親政)의 의지를 밝히고 나섰다. 그러자 심양왕 왕고는 충숙왕의 친정이 충선왕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대립각을 세웠다.

심양왕과 고려왕을 겸했던 충선왕이 1313년에 고려왕의 지위만 아들 충숙왕에게 전해주고, 1316년에 심양왕의 지위는 조카인 왕고에게 분리해서 내려줌에 따라 고려왕과 심양왕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320년(충숙왕7). 왕고는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원나라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왕위찬탈 음모를 본격화하였다. 때마침 고려에서는 채홍철(蔡洪哲)·권한공(權漢功)·채하중(蔡河中)·조적 등이 왕고의 힘이 강해지자 심왕당(瀋王黨)을 만들어 왕고를 고려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심왕옹립운동’이 일어났다.

채하중(蔡河中)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말했다.

“원나라 황제가 심양왕 왕고를 고려 국왕으로 삼았다.”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러나 나중에 호군 이련(李璉)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말했다.

“고려왕의 지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비로소 채하중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고려의 백관들이 중국에서 돌아온 관리들의 말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어도 충숙왕은 측근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냥과 주색에 빠져 국고를 탕진하고 있었다.

당연히 왕고의 참소는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때 마침 ‘백응구(白應丘) 사건’이 발생했다. ‘심왕부 재산을 관리하던 사복정(司僕正) 백응구가 돈을 횡령하여 고려로 도망쳤다’는 내용이 원나라 영종에게 보고됐다. 이에 영종은 ‘백응구를 호경으로 잡아오라’고 명했으나, 충숙왕은 백응구를 쉽사리 잡아들이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왕고는 원나라 황제에게 충숙왕을 모함했다.

“충숙왕이 황제 폐하의 조서를 손으로 찢어버렸사옵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원나라 영종은 교지를 내렸다.

‘충숙왕의 옥새를 회수하고 호경으로 호송토록 하라.’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