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국회 계류···“견제장치 있어야”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만행을 두고 IT 업계 특유의 고용 불안정성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근속연수가 짧고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업계 특성이 양 전 회장에게 무소불위 권력을 쥐어주는 배경 중 하나였다는 것. 언제라도 잘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직원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잘라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오만과 만나 빚어진 최악의 결과인 셈이다. 직장인들은 비단 IT 업계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모든 분야에서 양 전 회장 사건과 유사한 형태의 갑질이 존재한다고 토로한다.
‘왕’처럼 군림했던 가해자···피해자 ‘왜’ 가만히 있었나
비정규직으로 약 3년 동안 일하다가 올해 초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장인 A(27)씨는 “비정규직으로 회사를 다닐 때는 무조건 참았다”고 말했다. 그는 “은근히 성희롱하는 상사들이 꽤 있었는데 문제제기를 했다가 혹시나 정규직 전환될 때 불이익을 당할까봐 웃어넘겼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상사들도 내 처지를 알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규직에 노조 가입까지 돼 있는 직원조차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은 국내 기업 구조에서 비정규직 직원들은 더 기댈 곳이 없는 게 현실이다.
지난달 30일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 형태별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임금근로자 2004만 명 중 비정규직 비중은 올해 8월 기준 661만 명(33%)이다. 단순히 계산하면 직장인 3명 중 1명이 이러한 갑질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누구도 제지 못한
‘안하무인’ 행동
직장인 8년차 B(35)씨는 양 전 회장의 만행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가 다 화가 나더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라면 맞설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 없이는 대응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직장인이라면 모두 공감 할 텐데, 회사 내에서 인사권자 혹은 인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상사가 가지는 힘이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면서 “그들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그때그때 대응한다는 건 회사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양 전 회장의 행각 못지않게 사회적인 충격으로 떠오른 것은 그가 오랜 기간 안하무인 행태를 보여 왔음에도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난 3일 경찰에 출석한 폭행 피해자인 전 직원 C씨가 지난 2015년 폭행을 당할 때에도 주변에 있던 동료 직원 누구도 양 전 회장을 말리거나 C씨를 돕지 못했다.
직장인 D(33)씨는 “그 사람들을 이해한다. C씨를 돕는 게 싫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을 텐데 누가 나서려고 하겠나. 당장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땅콩 회항’이 그렇게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박창진(땅콩회항 사건 피해자‧現 대한항공직원연대 공동대표) 씨가 아직도 회사를 다닐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했다.
이번 사태 직전에는 교촌치킨 권순청 신사업본부장의 직원 폭행 논란이 있었다. 그 전에는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 이에 앞서 조현아 전 대한항공 상무의 ‘땅콩 회항’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알려봤자 도움을 받지 못 할 뿐 아니라 자신만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같은 일이 반복됐다는 점이다. 또 가해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언제나 도마 위에 오르면서도 매년 수차례씩 반복되는 ‘직장 갑질’ 논란을 막으려면 적극 처벌을 내리는 법안은 물론 정당한 문제제기를 한 이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상사 갑질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노동청 등에 신고하면 문제가 바로 시정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면서 “이런 장치가 전무하다보니 일부 기업 오너나 상사들 사이에서는 횡포를 부려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지적했다.
갑질 처벌 않는 게
근로기준법의 현실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받은 직장 내 갑질 제보 중 신원이 확인된 것만 225건이다. 이 중 폭행‧준폭행‧악질폭언‧황당 잡무지시 등은 23건이라고 이 단체는 밝혔다.
한 제보자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부인 앞에서 상사에게 허리띠로 맞았다. 상사는 회식자리에서도 뱀춤을 춘다며 허리띠를 풀어헤친 뒤 때렸다.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함께 물컵을 던지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제보자는 지난해 회식 자리에서 한 직장상사가 소주병을 거꾸로 집어 들고 자신을 가격하려 했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고객들이 볼 수 있는 영업장 안에서 수 초간 목을 짓눌리는 폭행까지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관련 내용을 담은 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지난 2013년부터 10여 건의 발의가 됐음에도 1건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난 9월에서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신설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으나 이번엔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막혔다.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가 매우 불명확해 해당 법이 시행되면 사업장의 혼란이 불가피하다’,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모호한 문구나 규정을 정확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통과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일부 법사위 위원들의 견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법안 심사 2소위원회로 넘어가 재논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 상황이다.
직장갑질119는 지난 4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국회 통과를 촉구하는 성명에서 “폭언과 모욕을 견디다 못해 그만두면 ‘자발적 퇴사’가 돼 실업급여도 받지 못한다”면서 “(폭행 같은 행위가 아니라도) 인간성을 파괴하는 상사의 갑질을 처벌하지 않는 게 현행 근로기준법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