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현대家 전쟁에 대비하라”

현대그룹의 행보가 발 빠르다. 현대택배를 중심으로 지배구조 재편에 나선 것이다. 현대택배에서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통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체제를 강화한다는 계산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현대그룹이 범 현대가와 세번째 경영권 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뒷말이 나돌고 있다. 취약한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현대건설 인수전 이후 시작될 경영권 분쟁에 고지를 점한다는 것이다.

현대택배가 현대그룹의 핵심기업으로 급부상 하고 있다.

지난 1월 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현대택배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 0.9%(6만4186주)를 장내 매수했다. 지난해 12월 15일부터 거의 매일 매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서 현대택배는 기존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6.41%에서 17.31%로 끌어올렸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사실상 현대그룹의 모기업으로 핵심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지분 18% 보유한 최대주주다.

현대그룹 측에 따르면 현대택배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매입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진행돼 왔다.


택배사, 현대그룹 중심으로

현대택배는 지난해 9월 현 회장의 모친인 김문희 여사에게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4.14%를 인수하면서 현대엘리베이터의 1대주주로 급상승 했다. 최대주주가 바뀌면서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도 대폭 변했다.

지난 1월 8일에는 현대택배가 보유한 현대아산 지분 13.77%를 현대상선에 매각했다. 당분간 손실이 불가피한 현대아산 지분평가 손실을 현대택배가 아닌 현대상선에 지겠다는 뜻이다.

현대택배는 향후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20%까지 확대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해 8월 현대택배는 150억원을 은행으로부터 차입하면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할 ‘총알’을 만든 바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그룹의 지배구도 변화를 “제3의 범 현대가 대전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재차 경영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를 감안해 보다 탄탄한 기반을 만드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차후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을 때, 적은 지분으로 효과적인 경영권 보호를 위한 순환출자고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는 기존의 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증권→현대엘리베이터의 구조에서 현대택배→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택배로 순환출자고리가 더욱 견고해졌다.

이런 현 회장의 선택은 취약한 지분에 대한 보강 차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현대그룹은 총수가 있는 자산 5조원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중 삼성과 SK그룹에 이어 총수일가 지분율이 세번째로 낮다. 현 회장 단독 지분은 1.29%이며 회장일가의 전체지분도 2.04%수준이다. 범 현대가와 경영권 분쟁이 발생한 것도 지분이 취약한 탓이었다.

현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현재 3차 경영권 분쟁의 방향타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현대건설이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모태였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현대상선 지분 8.3%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현대중공업그룹의 현대상선 지분이 25.47%인 것을 감안하면 현대건설 보유지분은 경영권의 향방을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범현대가와 인수전을 벌이게 될 때 현대그룹은 결코 유리한 입장이라고 보기 힘든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그룹 인수를 적극 추진하고 있지만 자본여력이 높은 현대중공업이나 KCC 등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심지어 무리해서 인수한다 하더라도 그룹 총체적 유동성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건설 경기가 악화된 탓에 현대건설이 ‘노른자’가 아닌 ‘골치’가 될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현대그룹의 상황이 좋지 않다.

현 회장이 그룹의 숙원사업으로 밝힌 대북사업은 여전히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상태며, 현대그룹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대상선과 현대증권는 불경기 여파를 직격타로 맞았다.


순환출자로 버틸 수 있나

결국 현 회장의 ‘제3 경영권 분쟁’ 대비는 현대건설 인수 실패 시나리오로 준비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업계의 목소리다. 하지만 현 회장의 지분이 높지 않은 만큼 늘 경영권 위험성에 놓여있는 상황. 결국 지배력 강화를 위한 편법이 순환출자인 셈이다.

하지만 이같은 현대그룹의 방침에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순환출자가 시장왜곡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한 관계자는 “순환출자로 경영권을 강화하는 것이 과연 주주의 이익인지 오너의 이익인지 가늠할 필요가 있다”면서 “현대그룹은 지주회사 전환 등으로 순환고리차 청산되는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취임 이후 두 번의 범 현대가 경영권 분쟁을 벌여온 현 회장. 그가 과연 이런 비판을 딛고 경영권 분쟁에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시선이 집중된다.


#부실경영 현정은 회장 “573억원 배상하라”

고 정몽헌 회장이 비자금 조성과 계열사 부당 지원 등으로 회사에 끼친 손해 수백억 원을 상속인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1월 9일 하이닉스 반도체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현 회장은 하이닉스에 573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고 정몽헌 회장 등이 비자금을 조성ㆍ관리하면서 회사를 위한 공적 경비 외의 목적으로 사용하고도 이를 정상적으로 지출된 것처럼 허위로 회계처리해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며 “현 회장 등은 각자 관련된 액수에 대해 배상할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현대그룹은 이에 항소할 예정이다.

한편 지난 16일에는 예금보험공사가 현 회장과 하이닉스 전직 임원 등 8명을 상대로 낸 불법 대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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