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계좌 공개되면…다칠 사람은 누구?

노태우 · 전두환

스위스 비밀계좌가 공개되면 안절부절 못하게 될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까지 국내에서 스위스 비밀계좌에 대한 비자금 의혹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위스 비밀계좌에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밀계좌 내역을 국내 수사기관이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이다. 때문에 의혹은 의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이 스위스 연방은행(UBS)로부터 고객명단을 입수하는 등 공개에 압력 수위를 높이면서 이같은 의혹이 씻겨 질 가능성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스위스 비밀계좌 관련 의혹에 휘말렸던 인사들을 짚어봤다.

스위스 비밀계좌로 유명한 스위스 연방은행(이하 UBS)의 비밀주의가 깨질지 전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이 연일 UBS 비밀계좌를 공개하라고 압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스위스 정부가 비밀계좌를 공개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외교 압박과 각종 소송 등을 감안하면 스위스 정부의 태도가 돌아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금융계의 공통된 견해다.

스위스은행은 비밀계좌에 예치된 자금의 예금주에 대한 비밀을 철저히 보장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따라 국제마피아의 검은돈은 물론 이란의 팔레비, 파나마의 노리에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필리핀의 마르코스 등 각국 독재자들의 부정축재 자금이 돈세탁·은닉 목적으로 스위스 은행에 예치됐음이 드러난 바 있다.


역대 대통령 비자금의혹 물씬

국내에서도 스위스 비밀계좌에 관한 비자금 의혹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다만 실체는 아직도 미지수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정책에 따라 확인이 불가능했던 탓이다.

당사자가 직접 밝히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밀계좌 특성 탓에 의혹만 무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스위스 비밀계좌 공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동안 스위스 비밀계좌에 관한 의혹의 단초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비밀 계좌에서 단골로 거론되는 주인공은 역대 대통령들이다. 대통령 재임기간 중 모두 한 몫(?) 잡고 퇴임했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다. 특히 이같은 의혹은 독재정권 시절에 더욱 극심했다.

청렴했다고 평가되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은 역대 다른 대통령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치권에선 꾸준히 나돌았다. 박 전 대통령 비자금 의혹은 당시 무소불위 권력을 지녔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관리됐다는 것이 핵심이다. 1978년 미국에 거주하던 이 전 중앙정보부장의 둘째 아들 이동훈 씨는 비밀 증언 형식으로 출석한 미 의회 외교위원회 국제 관계소위원회 청문회 증언대에서 이와 같은 의혹을 밝힌 바 있다.

당시 그는 “아버지 이후락의 스위스 비밀계좌는 박정희의 비자금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의 스위스 비밀계좌 비자금설은 흘러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만약 의혹이 사실이라면 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은 어디로 흘러들어갔을까. 정가에서는 이같은 의혹이 스위스 계좌 공개를 통해 해소되지 않겠냐고 보고 있다.


안낸 추징금 스위스 계좌에

“예금 29만원이 내가 가진 전 재산” 2003년 6월 서울서부지방법원의 재산 명시 신청과 관련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말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는 빈곤은커녕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비자금 의혹에 선두를 다툰다.

애초에 전 전 대통령은 5·18 쿠데타로 대통령직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집권기간에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거의 확립되지 않았거나 지극히 미약했다. 따라서 비자금 조성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했다. 그러나 군부정권 시절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에게 정치자금을 요구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 요구를 거부하는 대기업들은 도산의 운명을 맞이하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 정권 당시 그가 만든 비자금은 약 9500여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비자금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다. 전 전 대통령이 납부해야 할 추징금만 1672억원에 달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비자금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검찰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해외로 빼돌렸을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일부는 미국으로 빠져나가고 일부는 스위스 비밀계좌로 갔다는 의혹 등이 무성한 상황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도 전 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95년 10월 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은 국회에서 128억2700만원이 예치된 계좌의 예금 조회표를 흔들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 중 각계로부터 받은 거액의 비자금을 퇴임 후에도 은닉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통해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원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원가량이 남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 수사에서는 당초 주장과는 달리 기업체로부터 3400억∼3500억원을 받았고, 당선 축하금 1100억원을 합해 이 돈을 조성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진술을 바탕으로 비자금의 사용처를 대부분 찾아냈지만 900여억원의 행방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또 국민적 관심사였던 1992년 대선자금 지원 여부에 대해서도 노 전 대통령의 진술 거부로 진위를 가리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스위스 은행 비자금이 거론되는 것도 이 대목이다. 1994년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씨와 최태원 SK회장 부부는 미국에서 외환 밀반출 혐의로 곤혹을 치렀다. 문제는 당시 최 회장의 차 트렁크에서 스위스뱅크라고 쓰인 현금 묶는 종이 띠가 발견 됐다는 점이다.

검찰은 이때 최 회장과 소영씨가 보유한 19만2000달러가 노 전 대통령이 제공한 비자금이라는 진술을 확보했지만 스위스 비밀계좌를 찾지 못해 자금의 정확한 성격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 현재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519억 원을 미납한 상태. 스위스 비밀계좌에 그의 비자금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리라는 것이 추정만 무성하다.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다르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의혹만 분분할 뿐 이렇다 할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 비자금 의혹은 스위스 비밀계좌 논란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이다.

‘DJ-김우중-조풍언 삼각 커넥션 의혹’ ‘DJ 비자금 13조 원설’ ‘대북송금 리베이트설’ 등이 확대 재생산되며 정치권 안팎에서 나돌고 있다. 특히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스위스 계좌 은닉설’이다.

옛 안기부(현 국정원) 불법 도청팀인 ‘미림팀’의 실체를 밝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전 안기부 직원 김기삼씨는 김대중 비자금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DJ비자금’은 검찰수사로까지 번졌지만 사실이 규명되지 않은 김씨의 개인주장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는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DJ 내외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해 검찰 고소로 비화되기도 했다.


재계에도 스위스 비자금 의혹

하지만 스위스 비밀계좌 관련 의혹이 일고 있는 것은 전직 대통령 뿐만이 아니다. 한보그룹 정태수 전 회장 일가의 경우에는 스위스 비밀계좌가 확인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일가가 스위스 계좌에 은닉한 비자금은 32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 비자금의 실체와 출처에 대한 정 전 회장 일가의 입장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이 해외 도피중인 까닭이다. 정 전 회장은 2006년 2월 횡령 등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항소해 재판을 받던 중 2007년 5월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출국해 소식이 두절됐다. 현재 20개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다. 재판부는 같은 해 7월 “정씨가 병을 이유로 일본에 머물고 있다지만 출국 후 카자흐스탄 등을 여행한 것을 보면 위중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지만 정 전 회장은 귀국하지 않았다.

정 전 회장의 넷째 아들 한근 씨도 지난해 9월 검찰에 기소당했다. 1997년 11월 다른 회사 임직원들과 짜고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을 위해 설립된 동아시아가스(EAGC)에서 회사 돈 3270만달러를 스위스의 비밀계좌로 빼돌린 혐의를 받은 것이다. 검찰 측은 현재 스위스 로펌이 개설한 은행계좌를 거쳐 스위스의 비밀계좌 2곳에 입금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현재 한근 씨는 1998년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해외로 잠적,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도피생활 중이다. 검찰은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완료되는 점을 감안, 신병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불구속 기소했다. 정 전 회장 일가의 국세 체납액은 무려 3066억원에 달한다.

이 외에도 재벌가의 비자금 수사가 이뤄질 때마다 재계에서는 스위스 비밀계좌가 거론되곤 했다. 자금 은닉에 스위스 비밀계좌가 효과적 수단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과연 스위스 비밀계좌에 얽힌 이같은 의혹은 풀릴 수 있을까. 만약 스위스의 비밀주의가 깨진다고 해도 국내에서 UBS계좌 명단을 입수할 수 있는 것은 훨씬 뒤다. 스위스 정부가 비밀계좌 공개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고, 설사 공개된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스위스와 정보교환협정이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를 요청할 근거가 없다.

게다가 당장 UBS의 비밀주의가 깨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지난 3월 8일 스위스 정부가 비밀계좌 공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면서 미국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스위스 은행이 안고 있는 비밀이 영원히 지켜질 거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초 검은 돈의 집결지로 지목받으면서 스위스 은행은 점차 계좌 공개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외국으로 빼돌리는 자금을 추적하는 작업이 한창 이뤄지는 만큼 각종 비자금 관련 의혹이 풀릴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이 재계의 관측이다. 각종 의혹을 품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과연 누구의 비자금이 나올지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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